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나던피 Dec 19. 2022

유월오일 독립기념일

안전지대를 벗어나 또 다른 세상으로



병아리는 닭이 되고, 송아지는 소가 되고, 강아지는 개가 됩니다. 모든 짐승의 새끼는 적절한 시기가 오면 어미의 품을 떠나 자연의 세계에 발을 들입니다. 오리새끼는 길러 놓으면 물로 가고, 꿩 새끼는 산으로 가게 되는 거죠. 의심의 여지없는 생태계의 불문율입니다. 인간의 경우는 어떤가요. 갓난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가 자라 청소년이 되고, 또 성장의 시기를 거친 후 성인에 이르게 됩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보통의 경우 만 19세 이상이 되었을 때, 다 자라 성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객관적인 숫자. 살아온 연차를 빌어 성인이 되었음을 법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죠. 


하지만 숫자만으로 기다 아니다를 분별하기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꽤나 복잡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 속에서 경험치를 쌓아가고,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어떤 인상적인 지점에서 성장통을 겪으며 성숙의 과정을 거치니까요. 어른으로 진입하는 성장의 발화점이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누군가는 지독히도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을 통해 어른행 티켓을 얻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소속된 회사나 집단 내에서 사회생활의 쓴맛을 배우며 어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난관을 헤쳐나가며 어른에 한 발 더 가까워졌을 수도 있겠죠. 저의 경우에는 출가하는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일. 그것이 제가 어른이 되기 위해 내디딘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흔히는 스무 살이 됨과 동시에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경우에 한 번. 다른 도시에 취직이 되어 떠나는 경우에 두 번. 독립에 대한 타당성을 얻곤 합니다만, 저의 경우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날 일이 전혀 없었기에 관성처럼 부모님의 품 안에 지내왔습니다. 독립에 대한 드라마적인 환상만 있었을 뿐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건 그저 ‘남’의 영역일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독립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가 없다.’는 말은 ‘나는 독립할 용기가 없다.’는 말의 다른 형태였는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에게 기대는 일 없이 내 몫은 잘 해내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 착각은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던 거죠.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엄마가 차려주시는 따끈한 밥과 찌개, 그리고 각종 밑반찬들, 제 때에 세탁된 옷가지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마냥 집안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생필품들. 이 모든 것을 가능캐했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까지. 당연히 여겼기에 의식조차 못했던 그들의 사랑과 헌신, 보살핌을 방패 삼아 거친 세상의 풍파를 피할 수 있었음 알게 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들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음을 알아챘지만, 자주의 삶을 살아가는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내 삶을 온전히 꾸려나가고자 하는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설렘과 기대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때까지 제가 삶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와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에 따라 삶의 형태가 좌지우지될 수 있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한 부담감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누군가 선택해준 일을 따르는 게 더 쉽고 편했기 때문이죠. 


혼자 살게 된다면 집 위치는 어디로 해야 할지, 전세로 구할 것인지 월세로 지낼 것인지, 한 달 생활비 예산을 얼마나 잡아야 하는지, 공과금은 어느 정도 나올 것인지 등. 경제적인 부분에서부터 혼자 살게 된다면 세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세탁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는 타이밍은 언제인지, 밥은 어떻게 해먹을지, 음식물 쓰레기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때 무섭지는 않을지, 귀신 나오는 집이면 어떡할지 등. 생활 전반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고민의 영역도 다양하고 넓었습니다. 내 한 몸 건사하기 위해서 꾸려나가야 할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이 모든 것을 혼자 해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기 의심이 끊이지 않았죠. 이미 독립해 1인 가장의 역할을 해내며 지내고 있는 친구들이 어른스럽고 존경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도망칠 좋은 핑계들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독립하고 싶은 분명한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굳이 1순위를 뽑아보자면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내 공간을 가져본 적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건 단순히 ‘돈이 부족하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결핍을 내포하고 있는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넉넉하지 못하기에 작은 집에 살고, 공간이 좁기 때문에 가족이 부대끼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의도했든 아니든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어쩔 수 없이 공유하게 되어버리고 마는 거죠. 모든 현상에 양면성이 존재하듯 이런 상호작용 역시 그랬습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있다는 안정감과 소속감은 밝은 면이었지만,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소화시킬 공간이 필요한 순간에 그러지 못한다는 것은 어두운 면이었습니다. 인간은 혼자 지낼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인 것도 맞지만 독립된 개별적인 존재임도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시간이 지나며 나 스스로를 돌보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독립에 대한 그림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다이어트 성공 이후, 불쑥불쑥 찾아오던 달갑지 않던 폭식 증세는 나아지긴커녕 그 빈도와 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기어코 저를 잠식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절식과 폭식 사이클을 오가며 다이어트 강박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었던 저는 가시를 한껏 세운 고슴도치처럼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틈에 혼자 먹기 힘든 양의 배달음식을 시켜 급히 먹어 치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빵과 과자를 욱여넣기 바빴습니다. 새벽에 자다 깨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주방으로 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모두 꺼내 그것들을 해치웠습니다. 부모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 어둠 속에서 말이죠. 이런 식이장애가 발생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테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 행위는 자해와 다름없었다는 점입니다. 


엄마와의 싸움이 잦아진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엄마가 저를 위해 해주는 음식들, 마트에서 사 오는 간식들 모두 저에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어떤 날은 부모님은 드시지 않지만 그저 제가 좋아하기 때문에 사 온 먹거리들을 보며 절박한 심정으로 엄마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한 번에 많이 먹으니 이런 음식은 사 오지 말아 달라고 말이죠. 돌아오는 대답은 네가 조금 덜 먹으면 되지 않냐였습니다. 자식이 잘 먹는 모습이 그저 보기 좋아 그것들을 사 왔을 뿐인데 그런 저의 부탁이 엄마에겐 얼마나 얼떨떨했을까요. 이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지 못하고 짜증 내며 거부하는 제 모습이 한심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나를 어쩌지 못하는 그 패배감과 무력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정신에는 습한 안개가 가득 끼인 듯했고, 온몸은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묵직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겉보기에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처럼 보였으나 실은 보이지 않는 투명막에 갇혀 지내는 갑갑하고 고독한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결심이 섰습니다. 내 스스로를 구호하자. 나를 어쩌지 못하게끔 하는 상황에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자. 내 공간을 꾸려 내가 원하는 상황에 나를 두자. 그렇게 스스로를 돕자고 다짐했습니다. 자립에 대한 욕망의 크기가 커져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역전시키던 그 순간 저는 독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재밌게도 독립을 결심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린데 비해 결정 후에는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차곡차곡 모아둔 돈이 나의 배짱이 된 탓도 있을 겁니다. 앞으로 펼쳐질 진정한 어른의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를 환산한 값이었죠. 사람은 어느 정도의 돈을 쥐고 있어야 말과 행동에 여유가 배어난다는 사실을 이 시기에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친구 숭이의 소개 덕에 주방과 화장실이 딸려 있는 방 2칸짜리 다세대 주택의 1층 집에 세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보러 간 그날. 여러 가지로 인상적이었던 이 집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쪽 구석에 짱 박혀 낡고 오래된 창고를 연상시키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촌스러운 새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진 입구의 두 벽면이 중국의 춘절을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고개를 들면 곰팡이가 그득하게 끼여 본래의 색을 잃고 거멓게 변해버린 판넬 지붕이 시선을 사로잡았죠. 방 안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분홍색 꽃무늬 벽지로 도배된 두 방과 체리색 몰딩, 삐그덕 거리는 경첩에 겨우 매달려 반쯤 부서져 있는 방문, 집을 비운지 오래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벌레의 사체들, 이곳에 살던 누군가의 어린 시절 추억을 엿볼 수 있었던 이리저리 요란스럽게 붙어있는 스티커들까지. 


집을 보고 돌아온 날, 어쩐지 고달프고 서글픈 감정이 올라옴과 동시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이 함께 느껴졌습니다. 좀 더 깔끔하고 안전한 원룸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저는 이미 이 집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집을 마음대로 고쳐 써도 된다고 했던 주인아주머니의 말과 친구 숭이가 몰딩의 페인트칠을 도와주겠다던 말이 제 결정에 담보가 되어준 것 같습니다. 첫 독립에 집을 마음대로 개조시킬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 거죠. 앞으로 집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고되고 지칠 것이 너무나 명백했기에 ‘나는 이 집을 내 취향대로 고쳐쓸 것이다.’, ‘나는 홀로 서는 법을 배우기 위해 독립을 하는 것이다.’는 다짐을 수없이 되새기며 마음속에 굳은 의지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사가 예정된 날까지 제게 남은 시간은 한 달 남짓이었습니다. 집을 바꾸는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택의 연속’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도배와 장판, 페인트 색깔은 무엇으로 할지, 집 청소는 업체를 부를 것인지 내가 직접 할 것인지, 집은 어떻게 꾸밀지, 가구 크기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 가구 배치는 어떻게 해야 효율적이고 보기 좋을지, 디자인은 무엇이 좋을지, 조립형으로 살지 완성형으로 살지, 옷 짐은 어떻게 보관할지, 생필품은 무엇이 필요한지 등. 눈에 보이는 큰 부분에서부터 시작해 작은 부분까지 모든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했던 거야?’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사람 한 명이 사는데 이렇게나 필요한 게 많았구나 내가 지금까지 편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게 모두 부모님 덕이 었구나를 다시금 깨달으며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도 더러 있었더랬죠.


2021년 6월 5일. 본가에서 이삿짐을 꾸려 짐을 싣고 자취방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아빠가 제게 했던 말이 잊히질 않습니다. “아빠가 딸내미한테 미안하다. 큰 집에 살았으면 독립해서 힘들게 할 일 없었을 텐데.” 서른두 살 장성한 딸이 때가 되어 출가하는 것뿐인데 그 마저도 부모님께서는 미안함을 느끼다니. 마음이 요동치던 와중에 아빠가 덧붙인 말 한마디로 결국 눈물 스위치가 켜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애쓰면서 안 살아도 되니 인생을 편안히 살아.” 가족을 위해 그 누구보다 애쓰고 분투하며 살았던 아빠였기에 그 말에는 저를 뒤흔드는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독립을 하며 잘 살고 싶고 조급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그래. 내 마음 편한 게 제일 중요하지. 뭐가 문제야.’하며 나를 다독였습니다. 그렇게 이 날은 제 스스로 지정한 독립기념일이 되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이부자리부터 정리하고 물 한잔 마시는 일. 생각보다 금세 어질러지는 집을 청소해줘야 하는 것. 집에 생기는 예상치 못한 에러 사항들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점. 집이라면 당연히 있는 줄 알았던 손톱깎이나 수저 같은 사소한 생필품은 내가 챙겨야만 한다는 것. 갑자기 벌레가 튀어나와도 오롯이 혼자 잡아야만 하는 끔찍함. 집 냉장고에 밑반찬이 당연하다는 듯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 한 끼는 내가 차려 먹는 경험. 설거지를 미루지 않아야 날파리가 꼬이지 않는다는 것. 화장실 청소는 생각보다 더 고되다는 점. 하루 동안 인간의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빠져 바닥을 더럽힌다는 것.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고 분리수거를 하는 일. 전기세와 도시가스 요금, 수도세를 내며 책임감을 느끼는 일. 집세를 포함한 매달 생활금 예산을 짜며 골머리 앓는 경험. 


머릿속으로 걱정만 했던 일들을 직접 부딪쳐보니 생각만큼 저를 괴롭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당장 눈앞에 문제가 발생하면 신경이 곤두서고 피곤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문제들을 방치만 하지 않는다면 결국 해결되는 일들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결국에 모든 문제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 나갈 수 있었거든요. 이로 인해 독립을 하기 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만 가지고 있던 나와 독립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저는 자주(自主)와 자립(自立) 나아가 자존(自尊)을 제 정신과 몸 구석구석에 새겨 넣었습니다. 인생은 온전히 나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고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통감하며 저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 미국의 인권 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가 한 말입니다. ‘독립’이라는 장벽을 쓰러트렸을 때, 저는 제 스스로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긴 거예요. 눈앞에 또 다른 벽을 마주한다 할지라도 그 벽을 눕힐 수 있는 나에 대한 믿음이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거라 생각합니다. 벽을 넘어 앞으로 계속 전진해보려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이 듦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