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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ero Jan 13. 2024

코라 순례길, 마니차를 돌리며...

나의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은 김찬삼 선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중학교 때 삼중당 문고판으로 나온 '김찬삼 세계일주'는 안현필의 '영어 실력기초'보다 훨 재밌었다.

독후감의 기억 조각 가운데 하나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는 장면이다. 선생께서 살아 있는 예수 슈바이처를 만나고 헤어지는 기행문은 어린 내게 가보지 못한 곳,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의 불쏘시개가 됐다.

이후 육군 병장 시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내무반에 있던 진중문고를  뽑았다 뺐다를 반복하다가 우연찮게 읽기 시작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슈바이처)가 칙칙한 내 일상의 가로등이 됐다. 지금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구절.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들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 (슈바이처 /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중에서)

맥간 남걀사원 입구에는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며 분신한 사람들의 영정이 눈에 들어온다.

어차피 영생은 없는 것이겠지만 살아있는 동안 그대와 일상을 나누고 싶었던 남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들을 기억할 것이다. 기억하던 그들도 떠나갈 것이다. 그리고 모두 잊혀질 것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권력은 무한하다. 화염에 휩싸여 스러져간 개인은 잊혀지고 황금비단을 두르고 호화로이 묻힌 공인은 기억된다? 속절없는 질문일 것이다. 그렇게 기억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권력은 늘 이같은 희생을 기억하라고 채근한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 기억의 결과가 또 다른 권력의 공고함을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 보다도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만드는 법이다.(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에서 )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 다시 삶의 문을 열어준 슈바이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 기억의 순간부터가 영생이었을런지 모른다. 슈바이처 역시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삶의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생명들 속에서 그 역시 살고자 했으니까... 남걀사원 코라길을 시계방향으로 돌며, 마니차를 돌리며, 소망했다. 더이상 시침이 거꾸로 돌지 기를...더이상 희생이 이어지질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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