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은 항상 경험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 부임해 오신 보좌신부님, 30대 중반쯤 되신 것 같다. 강론을 들을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령 이 같은 대목에서다.
-착한 사람이 어렵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나쁜 사람이 삶을 편하게 마무리하는 경우는 드물지요. 관성이란 게 있어서 착한 사람들은 늘 착하게 살면서 죽음도 쉽게 맞이 하거든요. 하지만 평생 남 힘들게 하면서 살다가 편하게 생을 마감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관성이란 게 있어서, 착한 사람은 착하게, 악한 사람은 악하게 인생도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관성이란 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오래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도 관성처럼, 물 흐르듯 그렇게 흘러갑니다.
불혹까지 가지 않으신 보좌신부님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저렇게 꿰뚫어 보실 수가 있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부님이 선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일 거라고.
난 고지대 여행을 주저한다.
스위스 융프라우에 올라갔을 때 처음 고산증을 경험한 이후 높은 산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속이 미식미식해 오는 데 알프스의 경치고 뭐고 즐길 여유가 없었다. 이런 게 고산증이란 것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이후 4천 미터 넘는 곳에 갈 때면 걱정부터 앞선다.
맥간의 고도는 대략 2천 미터, 이 정도면 큰 문제없다. 하지만 그 이상 올라갈 때면 걱정이 앞선다. 트리운드 트레킹에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다. 맥간-트리운드 트레킹은 하루 코스로 충분히들 다녀오는 산행이다. 우리나라 백두산 보다 조금 더 높은 산이다. 작은 히말라야 체험을 위한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난 3천 m 아래에서 소요음영하다가 하산했다.
행복은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야 한다. 행복도 관성이 붙는 것일까? 행복한 사람이 행복하다. 내가 20대 때, 30대 때 부지런히 2천 m, 3천 m, 4천 m 고산을 올랐다면, 그 관성에 힘입어 5천 m, 6천 m를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시도를 지금에 와서 하려 하니, 마음의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다.
남은 나의 시간들을 좀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연습으로 채우면 나도 4천 미터 이상 올라갈 수 있을까?
내 일상의 관성은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라다크 레에 갈 수 있을까? 판공초 호수를 볼 수 있을까?
달라이 라마와 그를 좇아온 티베트 사람들은 지금 내 눈앞의 두 배는 더 높은 설산을 넘어 이 나라에 온 것일 텐데, 나는 이제 그 높이의 중턱쯤에서 오르막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간다.
나쁘게 살아온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선한 마침표를 찍길 원한다고 치자.
앞으로 착하게 살 것을 결심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데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이걸 어쩌지....
착하게 살자!
세 얼간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맥간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