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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희 Oct 08. 2024

신앙 체험수기 1

청주교구 도보성지순례 

제1회 신앙체험수기 공모에서 9월 27일 천주교구 도보 성지 순례에서 주교님으로부터 우수상을 시상을 받았습니다. 20여 년이 넘는 천주교 신자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신앙체험들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다소 많아 3회에 걸쳐 브런치스토리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신앙체험이자 우리 가족, 더 나아가 천주교 신자로 살아온 삶의 여정입니다. 함께 할 수 있어 감사드리고 관심으로 읽어 주시면 제게는 큰 격려와 기쁨이 되겠습니다. 



천사가 이끌어준 삶의 이정표, 참된 신앙 

    

  2002년 6월 천사 아내의 끈질긴 권유로 성당에 가게 되었고, 그해 12월 아내와 세례를 받았다. 그 뒤 두 딸과 아들 그리고 부모님까지 용암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집안이 되었다. 사실 마지못해 갔던 성당이었지만 천주교 신앙이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축복된 삶을 살아온 것에 무한 감사를 드린다. 이야기는 6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충북 제천시 백운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탯줄이 목에 감겨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집안에 장손이고 첫 번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불안하셨다. 하루는 시주하는 스님이 집에 오셨는데, 목에 탯줄을 감고 태어난 아들 얘기를 하니까 “절에 다녀야 모질고 사나운 운수를 막을 수 있다.”라고 하여 어머니는 절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내가 50이 넘어서도 자식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속리산 수정암 절에 다니셨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던 기억이 있다. 절밥을 먹던 것과 어머니의 기도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나에게 아내는 세 아이를 낳고 큰딸이 유치원 다닐 무렵에 교회를 다니면 좋겠다고 하였다. “아이들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유산이다.”라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절에 다니는 어머니의 모습이 각인되었기에 교회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죄를 짓는 일 같아 아내 말이 탐탁하지 않았다. “내 방식대로 바르게 살면 됐지, 무슨 종교가 필요하냐?”라고 외면하면서 필요하면 혼자 나가라고 타박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속마음은 절대 나가지 않기를 바랐다. 당시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고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퇴근해 집에 오면 잠자기 바빴고, 어쩌다 쉬는 날이면 피곤하여 병든 닭처럼 잠으로 보냈다. 치열하고 피곤한 상황에서 신앙생활은 생각할 수 없었다. 아내는 잊을만하면 교회에 다니자고 말을 꺼냈다. 그럴 때마다 앵무새처럼 “우린 무교니까 신경 쓰지 말어.”라고 얼버무렸다. “다니고 싶으면 혼자 다니지, 왜 나를 끌어들여 피곤하게 만드냐.”며 화내고 다툴 때도 많았다. 아내는 “내가 성당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라고 하였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아내가 철없어 보이고 얄미웠다.


   1995년 12월 서울에서 청주로 직장을 옮겼다. 부모님도 청주에 계시고 학교도 이곳에서 다녔으니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였다. 아내도 한동안 성당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고질병이 돋아나듯 다시 말을 꺼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도 용암동 성당에 다니고 있는데 가보고 싶다는 것이다.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잊을만하면 성당 얘기를 꺼낼 때 ‘대체 왜 저럴까?’ 하며 내 입장 은 안중에도 없는 아내가 남같이 느껴졌다. 청주로 직장을 옮기고 출장과 접대로 집에 늦게 들어올 때가 많았다. 나의 변하지 않는 생활에 아내는 불만이 쌓여 가는 듯했다. 그러나 가정을 위해 고생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가 더 야속하게 느껴졌다. 나의 상황은 이해하지 못하고 번번이 교회 나가자는 얘기를 할 때는 꽉 막힌 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였다. 2002년 5월 접대로 집에 늦게 들어와 말다툼으로 냉랭한 분위기가 되었다. 아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5월 마지막 일요일 덕유산 향적봉으로 철쭉을 보러 갔다. 즐거운 마음으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데 “자기야 성당 한 번만 가보자.”라고 하였다. 여기까지 와서 성당 얘기를 할 줄은 몰라 순간 화도 나고 당황스러웠다. 엊그제 늦게 들어와 미안함도 있었는데 거절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 같았다.  


   임기응변으로 “그럼, 한 번만 가보는 거야.”라며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아내는 성당에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흐뭇해 보였다. 그 말 한마디가 20년 넘게 성당에 다니게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다음 주 일요일 아내는 예매한 티켓이라도 내밀듯 성당 가자고 하였다. “남아 일언 중천금,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하나 못 들어주냐.”며 알았다고 하였다. 불편한 심기의 나와는 다르게 아내는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기쁜 표정이 역력했다. 가본 용암동 성당은 신축되었고 크고 웅장했다. 낯설고 어색한 성당에서 교중미사도 참석하였다. 속으로 “이제 성당에 와봤으니 더는 얘기하지 않겠지.”라면서 위안을 했다. 미사 끝나고 성당 밖으로 나오니 신부님께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디서 왔냐?”며 물어보셨다. 아내가 “신자는 아니고 성당이 어떤 곳인지 구경 왔다.”라고 하였다. 신부님은 잘 왔다며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리고 평소 사회에서 알고 지내던 신자도 몇 분 만났다. 성당을 다녀 보라며 예비자교리를 신청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아내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예비자교리를 신청하겠다고 하였다. 내 생각과 다르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도 체면상 의사표시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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