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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Jun 07. 2024

경이로운 일출을 만나다.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31

  2022년 6월 9일

 걷기 27일 차: 폰세바돈 -> 몰리나세카 -> 폰페라다


 그동안 아프지 않고 잘 버티던 아빠가 체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잠을 못 자면 컨디션이 떨어지는데 걱정이다. 잠을 못 잔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새벽 5시 밖으로 나가 밤하늘 가득한 별을 만났다.

 오늘은 내가 순례길에서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 중에 마지막 하나가 남은 날이다. 철의 십자가에서의 일출. 그동안 운이 좋게도 내가 부모님과 함께 경험하고픈 것들을 모두 할 수 있었는데 오늘도 날씨 운이 좋을 것 같다. 폰세바돈 마을을 빠져나가는 오르막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서서히 날이 밝아지고 있다.

폰세바돈에서 철의 십자가까지는 멀지 않다. 약 30-40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된다. 일찍 출발한 덕에 일출 시간보다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갔을 때는 철의 십자가에 사람들이 옹기종이 모여 앉아 일출을 기다렸다면 이번에는 돌무더기 아래에서 한 명씩 올라가 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분위기였다. 부모님도 아빠가 어제 열심히 적었던 돌멩이를 내려놓고 기도를 하셨다.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일출이 잘 안보일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분위기가 나름 신비로웠다.

 찬란한 해가 떠오르며 안개를 걷어내고 제일 먼저 위쪽 철 십자가를 비추었다. 내 걱정이 무색하게 정말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안도감이 느껴졌다. 드디어 하늘이 도와 날씨가 좋아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함께 경험할 수 있구나란 강한 안도감. 개인적으로 순례길에서 경이로움을 마주했던 몇 안 되는 소중한 경험이었기에 꼭 함께 하길 간절히 기도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해냈구나.

 해발 1504m라는 높은 지대의 산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 계속된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뻥 뚫린 경치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특히 산 골짜기에 갇혀있는 구름이 장관이었다.

 귀여운 강아지가 있는 푸드트럭이 만다린에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분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한가로이 넓은 풀밭에서 풀을 뜯던 엄마소들은 아기소를 데리고 물을 마시러 왔다. 아기소를 부르는 엄마소의 울음소리가 정말 신기했다.

<가장 높은 고도인 1515m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올라왔으니 내려갈 일만 남았다. 이 내리막은 꽤 위험하다. 고도가 급격히 낮아지기 때문에 내리막의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갈길이라 발을 잘못 내디디면 발목을 다칠 위험이 크다.

 철의 십자가에서부터 아세보까지는 자전거 순례자가 이용하는 도로로 내려갈 수도 있다. 도로가 있기 때문에 철의 십자가에서 택시를 부를 수도 있다. 엄마 무릎이 안 좋아서 차를 부를까 살짝 고민하긴 했지만 멋진 일출을 보고 나니 힘이 났기에 무사히 걸어서 아세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내리막길 아래에 자리 잡은 조용한 마을인 아세보는 마을 입구에 큰 바가 두 개가 있다. 당연히 우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첫 번째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기 파이와 오렌지 주스를 먹었다.

<엘 아세보의 산 미겔 성당>

 아세보 마을을 빠져나가면서  고민을 했다. 이곳에서부터 몰리나세카까지도 꽤 가파르기 때문이다. 오늘 가장 높은 고도인 1515m에서 끊임없는 내리막길을 걸어야 고도 590m인 몰리나세카에 도착한다. 방금 내려온 내리막이 엄마 무릎에 조금 무리였을 수 있기에 우리는 조금 길을 돌아가더라도 도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아스팔트 길을 걷는다는 건 꽤 무리가 되는 일이었지만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몇 명의 순례자들이 보였다. 사람이 걷는 길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차량 통행이 거의 없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다.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와 몰리나세카에 도착했다. 우리는 너무 더웠다. 어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멋진 일출을 보여준 태양은 사정없이 내리쬐어 땅을 뜨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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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있었다. 강 근처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주문했다. 꽤 푸짐한 참치 샐러드와 오징어 튀김은 맛있었다. 이곳에서부터 폰페라다까지는 볼만한 경치도 없고 마을을 통과하는 도로를 따라 걷기 때문에 식사를 마칠 무렵 난 택시를 불렀다.

 이곳 몰리나세카에서 머무는 순례자들도 많다. 철의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길이 쉽지 않기도 하고 이곳까지가 20km가 조금 안되기 때문에 거리도 적당하다. 이 마을도 꽤 조용하고 아기자기하기 때문에 나도 한 번쯤 머물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폰페라다로 가는 이유는 그곳에 커다란 템플기사단의 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컸다. 순례 중 만나는 마을 중엔 꽤 큰 도시도 있고 순례자만을 위한 작은 마을도 있다. 가끔은 모든 마을에 하루씩 머무른다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꽤 색다른 순례가 되지 않을까?

 성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여전히 더워서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라 엔시나의 성모 바실리카>

  성당 앞 광장의 작은 물줄기에도 즐거워하는 아이들 모습이 귀여웠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산 마틴 델 카미노에서 같이 묵었던 한국분들이 계셨다. 이곳 숙소에서는 신라면도 팔고 있어서 저녁은 가볍게 라면으로 때웠다.

 잠을 못 자고 무더운 날씨에 컨디션이 꽤 좋지 않았다. 그래도 철의 십자가에서 일출을 보았으니 오늘 할 일은 다 한셈이다. 오늘은 푹 자야지.



*숙소 정보: ALBERGUE GUIANA NOT BAD.

 우리는 6인실 도미토리를 3명이서 쓰도록 예약했다. 알베르게는 깔끔하고 컸다. 식당도 넓고 신라면도 팔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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