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33
2022년 6월 11일
걷기 29일 차: 비야프란카 델 비에르조 -> 라스 에레리아스
어젯밤에 소화제를 먹은 아빠가 위산 분비가 많았는지 속이 쓰리다고 하셨다. 약을 챙겨드리고 이런저런 신경이 쓰여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무래도 고령의 부모님과 다니다 보니 건강 문제가 제일 신경 쓰인다. 배낭 하나엔 두 분의 약만으로 가득 찰 정도니까.
그리고 아빠가 아픈 것도 아픈 거였지만 금요일 밤 도로 옆 숙소는 꽤 시끄러웠다. 역시 후기를 너무 신뢰하면 안 된다. 물론 평소에는 조용할 수도 있겠지만. 방에서 가볍게 과일을 챙겨 먹고 길을 나섰다.
도로 옆을 따라가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길이고 차량 통행도 거의 없어 심심하지는 않은 길이다. 옆에 계곡 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도 좋고. 앞 뒤 순례자도 거의 보이지 않아 차분히 걸을 수 있는 코스이다.
4년 전에 묵었던 피레제 마을을 지났다. 알베르게 하나와 식당 하나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정말 고요했다. 담벼락에 핀 장미꽃들만이 우리를 반겨주는 기분이다.
오전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 컨디션이 좋지 않아 천천히 걸었다. 우리의 평균 속도는 1시간의 3.5km 정도이다. 늦은 속도는 아니다. 평균적으로 1시간에 4km를 걸으니까. 아무래도 잠을 못 잔 것도 있지만 한국을 떠나온 지 30일이 넘어가면서 피곤함이 몰려드는 것 같다. 내가 출발 전 걱정했던 것도 이런 부분이다. 외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지치고 힘들까 봐. 다행히 큰 부상은 없지만 컨디션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 같다.
길을 걷다가 엄마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했다. 바로 네잎클로버 찾기. 아빠랑 내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엄마는 눈길만 주면 네잎 클로버를 찾는다. 오늘만 6개를 찾았다. 엄마 말로는 클로버가 있는 곳을 지날 때 천천히 걸으며 눈길을 주면 네잎 클로버가 그냥 눈에 띈단다. 정말이지 대단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엄마가 찾은 네잎 클로버는 갖고 다니는 책 속에 조심히 끼워놓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준다.
비가 내렸다 그쳤다는 반복하는 날씨다. 사진으로만 보면 쨍해 보이지만 여우비라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 우비를 챙겨 입기도 귀찮아져서 배낭 뒤에 걸치고만 다녔다.
오늘의 목적지 전 마지막 마을에 도착해서 꽤 오래 쉬었다. 실내보단 밖에서 쉬는 편인데 오늘 함께 쉬는 분들 중에 흡연자들이 많아서 중간에 자리를 옮겼다. 순례길에서도 흡연을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는데 다행히 길을 걸으며 피우시는 분을 만나지는 않았다. 대부분 휴식을 취할 때 바의 외부에서 흡연을 하는 편이다. 아니면 이 기회에 금연을 한다는 분들도 꽤 있었다. 유럽은 우리나라보다 담배값이 비싸다고 한다.
역시 봄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꽃을 좋아하셔서 가을보단 봄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쁜 장미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정말 좋다.
주말이라 그런 지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야외 스포츠를 즐겨보려고 노력했는데 여전히 난 산책 외엔 모든 것이 별로이다. 이런 내가 순례길을 2번이나 걷고 있다니 나를 아는 사람들은 무척 놀라워한다.
마치 한가로운 강원도 어느 시골마을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드는 하루다. 도로 옆길에 차도 없고 졸졸 시냇물 소리가 계속 들리고 한가로운 시골길을 걷다가 갑자기 마주한 오늘의 숙소.
마을에 들어가기 전 길가 옆에 위치한 숙소였다. 숙소는 식당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니 점심시간이라 빠르게 씻고 밥을 먹으러 갔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좋아 야외에서 소풍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밥을 먹고 테라스에 앉아 구경도 하고 멋진 고목에 핀 장미꽃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오 세브리오에 숙소를 잡지 않고 이곳을 선택한 것이 정말 좋았다. 이런 게 전화위복인가?
숙소도 조용하니 푹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녁 식사도 만족스러웠다.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거대한 구름 산이 신기했다. 내일 새벽에 비 예보가 있는데 다행히 아침 식사 시간이 늦어서 운이 좋으면 비가 그치고 산을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힘내야지. 산티아고 가기 전 마지막, 가장 높은 산이다. 그리고 드디어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가는 내일. 컨디션이 좋아지기를 바라본다.
*숙소 정보: PARAISO DEL BIERZO
지금까지 묵었던 숙소 중에 베스트라고 할 수 있다. 새로 지은 듯해서 깨끗하고 내부 인테리어와 밖의 정원도 좋았다. 사람들이 많이 머물지 않는 마을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산을 오후에 넘기 힘들면 이곳에서 하루 묵고 올라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