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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Apr 09. 2024

시끄러운 마음 다스리기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20

 2022년 5월 29일

 걷기 16일 차: 온타나스 -> 카스트로헤리츠

 오늘은 온타나스에서 다음 마을인 카스트로헤리츠까지 9km를 걷는 일정이다. 대부분의 순례자는 어제 우리가 걸음을 멈춘 요르닐로스 델 까미노에서 출발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께 내가 좋아하는 마을을 보여드리고자 우린 온타나스까지 온 것이다. 오늘 일정을 더 길게 할 수도 있었지만 카스트로헤리츠에는 오리온이라는 한국인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다. 라면과 김밥을 팔고 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라 지나칠 수가 없어 미리 예약을 했다. 나는 한식을 그리워하지 않는데 부모님은 다르니까. 한국을 떠난 지도 거의 20일이나 지났기에 일정을 변경하지 않고 오늘은 조금만 걷기로 했다.

 여유로운 일정이라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

<밀밭에 쏘옥 머리를 내밀은 양귀비꽃>

 분지인 온타나스를 빠져나가는 길 옆은 온통 밀밭이었다.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면 한적한 도로가 나온다. 도로 위 이젠 폐허가 되어버린 산 안톤 수도원 유적이 보인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 살펴봤는데 비록 군데군데 없어지고 뼈대만 남았지만 그 옛날에는 규모가 상당했을 것 같다. 지금은 순례자 몇 명만 받을 수 있는 도네이션 알베르게로 운영되는 작은 공간과 이곳 터줏대감처럼 보이는 고양이가 있었다.

 이후 카스트로헤리츠까지 가는 도로 길은 단조로운 길임에도 불구하고 밀밭과 양귀비꽃밭으로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쁜 풍경 덕분에 즐겁게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사노의 동정녀 성당>

 마을 초입에 있는 만사노의 동정녀 성당은 박물관 같았다. 아니면 특별 전시를 한다거나. 마리아에 관한 다양한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성당을 둘러보곤 알베르게로 향했다. 아직 알베르게가 문을 여는 시간은 아니었다. 이렇게 일찍 도착한 적이 없기에 숙소 앞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길 위에서 이런 여유로움이 낯설었다.

 점심을 먹고 마을을 구경하러 나갔다. 생각보다 김밥은 좀 짰지만 그래도 타지에서 김밥이라니. 새로웠다.

<산토 도밍고 성당>

 마을 중앙에 있는 산토 도밍고 성당도 역시 전시를 하고 있었다. 영상을 활용한 전시인데 한국어로도 영상 설명이 나왔다. 성당 안에서 영상쇼라니 신선했다. 공간이 주는 힘이 있기에 가벼운 영상과 전시임에도 새롭게 느껴졌다.

 마을의 또 다른 끝에 있는 작은 수도원 같은 곳을 구경했다. 원래 무슨 가게라고 해서 그쪽으로 갔는데 수도원처럼 생긴 곳이 나왔다. 문이 열려있어서 들어가 보긴 했는데 역시 언어를 모르니 어려웠다.

 알베르게에 돌아오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만난 한국인 아주머니와 길에서 가끔 만나던 한국인 부부였다. 우리는 6인실 방에 함께 묵게 됐다. 아무래도 한국분이 주인이다 보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알베르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예약 현황을 보면서 한국인과 외국인으로 방을 나눠준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묵는 도미토리라 걱정했는데 그래도 한국분들과 함께 쓸 수 있어서 좋았다.

 저녁은 고대하던 비빔밥이 나왔다. 거기에 고추장에 된장국까지. 타지에서 맛보는 한식이란 언제나 맛있는 법. 옆 테이블에 앉은 외국인들도 꽤 즐기는 듯 보였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추천받은 카스트로헤리츠 성벽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분명 가는 길 설명을 들었는데 무척 가파른 엉뚱한 곳으로 올라가 버렸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들었다.

 사실 오늘 아침 아빠의 행동에 짜증이 난 하루였다. 아주 사소한 거였는데 아빠는 늘 앉아서 식사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린다. 특히 외국에 나와서인지 같이 빵을 고르러 가자고 해도 그냥 네가 골라오라며 움직이질 않는다. 물론 이곳에서는 아빠가 말도 안 통하고 빵 종류도 잘 모르니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실패하더라도 선택할 수는 있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이다.

 부모님과 오래 떨어져 살다 보니 이렇게 함께 지내본 적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이다. 그래서인가 아빠의 약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짜증이 난다. 분명 70이 넘은 아빠에게 이 길은 힘든 길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처럼 모든 걸 혼자 할 수 없다는 생각도 아빠를 힘들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난 아빠가 조금씩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 이건 내 욕심일까?

 이런 뚱한 마음이 속시원히 뻥 뚫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이 사르륵 풀린다. 그래, 조금만 더 아빠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멋진 풍경을 보며 열심히 사진을 찍는 아빠의 모습도 참 보기 좋다. 부모님과 함께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지금 이런 순간조차 그리워질 날이 올 것이니까.

지금 순간을 즐기자. 그리고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아주 후련한 마음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성벽을 돌고 돌아 마을 반대편으로 내려왔기에 돌아가는 길에 골목 투어를 할 수 있었다. 예스럽고 한적했다.


 오늘은 짧게 걸어서 여유가 있어서인지 사소한 문제로 마음이 시끄러웠다. 그렇지만 그 시끄러운 마음까지 잠재우는 멋진 풍경을 만났다. 이 순간을 그리워할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한다. 더 여유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생각이 깊어지는 메세타 구간의 시작이다. 좋은 생각만 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잔뜩 만들자.



*숙소 정보: 오리온 알베르게

 한국인 주인아주머니가 운영하는 곳으로 깔끔하고 마스코트 고양이가 상주한다. 한식을 그리워하는 한국인이라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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