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고구마의 단 향, 익어가는 사랑

삶의 지혜가 피어나는 따뜻한 방에서

by 진주

군고구마 향처럼 달콤한 효심이, 이 집의 공기를 데운다.


하루에도 여러 어르신 댁을 방문한다.

불 꺼진 방, 외로운 침대에 누워

누군가의 부재 속에서 하루를 버티는 분들을 뵐 때마다

가슴 한켠이 저릿하다.

혼자 사는 어르신들의 방은 어둡고 늘 조금 춥다.

찬 냉기로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그러다 이 집의 문을 열면, 세상이 달라진다.

문틈 사이로 군고구마의 단 향이 스며 나와

후각보다 먼저 마음을 데운다.

그 정겹고 달큼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이 집 어르신은 내가 만나는 수많은 어르신들 중

가장 복된 황혼의 주인공이다.

며느리와 함께 사시며, 그 곁에서 매일 정성의 온기를 받는다.


며느리는 출근 전,

어머니의 간식과 약, 따뜻한 물 한 병을 잊지 않고 챙겨둔다.

그 손길에는 계산이 아닌 습관이 된 사랑이 배어 있다.

볕이 잘 드는 안방은 온전히 어르신의 몫이다.

아들과 며느리는 건넌방의 작은방에서 지낸다.

문을 열면 침대에 기대앉은 어르신의 모습이 보인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는 소녀처럼 단정하고,

염색하지 않은 머리칼 사이로 은빛과 흑색이 어우러져 있다.

세월이 머물렀다는 흔적이 오직 이마께에만 살짝 스친 듯하다.


“간호사 양반, 다리가 하도 저리고 쥐가 나서 혼났어.”

어르신은 늘 그렇듯 웃음 반, 걱정 반의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기침이 잦고 마른 가래가 달라붙어 약을 드셔도 낫지 않지만,

그마저도 담담히 받아들이신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이면 증상이 심해지지만

그 시절의 노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내셨다.

아픈 데가 있어도, 투덜대지 않고 묵묵히 견뎌온 시간의 품격.


비록 산책은 잠시 멈췄지만

어르신의 방은 늘 정갈하고 따뜻하다.

식사 후 남은 컵 하나에도

며느리의 세심한 손길이 닿아 있다.

나는 생각한다.

‘복된 황혼’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 나날이 편안히 이어지는 삶,

서로의 자리를 지켜주는 평화로운 동행.


며느리를 칭찬하자, 어르신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씀하신다.


> “고부가 잘 지내려면, 서로 말을 아끼고 조심해야 해요.”




짧지만 깊이 있는 한마디.

그 속에는 세월이 익혀낸 삶의 지혜가 고요히 배어 있다.

그 말은 어느새 내 마음에도 잔잔히 번져

오늘 하루를 돌아보게 한다.


불 꺼진 다른 집들의 냉기와는 달리

이 집에는 삶이 천천히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냄비 위에서 김을 내뿜는 군고구마처럼,

사랑이 이 집 안에서 오랜 시간 은근히 데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집으로 가는 길’이란

거창하거나 먼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고,

서로를 배려하는 지혜가 그 집에 머무를 때,

그곳이 바로 가장 평화로운 귀향의 자리 아닐까.


나는 오늘도 그 향기로운 집을 나서며 생각한다.

군고구마의 단 향처럼,

익어가는 사랑이 세상 곳곳에 스며들기를.


언젠가 누군가의 방문 앞에서도

이런 따뜻한 냄새가 나기를.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가장 단순하고도 깊은 효심의 형태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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