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문 너머

서로에게 보내는 존엄의 처방전

by 진주


오늘도 나는 가방 속에 '존엄'이라는 보이지 않는 처방전을 챙겨 넣고 익숙한 초인종을 누른다. 가방 안에는 새살을 돋게 한다는 자운고(紫雲膏)와 깨끗한 거즈가 들어있지만, 정작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은 헐어버린 환부뿐 아니라 어르신의 무너진 자존감까지 보듬을 수 있는 온기다.

하지만 오늘, 초인종 저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차갑기만 하다. "오전에 외출을 하고 왔더니 문을 열 기력도 없어요. 오늘은 그냥 가세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선다. 머리로는 어르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그 거절이 나라는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내려앉는 씁쓸한 거절감까지 막아서기는 어렵다. 방문간호사로서 나의 진심이 저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짓누른다. 나는 짧은 대답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고 올게요."

터벅터벅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차에 오르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린다. 조금 전 냉랭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어르신은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정말 몸이 힘들어서 그랬노라고 다시금 강조하신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나는 깨닫는다. 어르신이 닫아건 것은 나를 향한 벽이 아니라, 당신의 쇠락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었음을.

안타깝게도 이 전화는 우리 사이의 마지막 연결이 되었다.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한 채 몇 번의 예약 취소가 반복되었고, 결국 서비스는 중단되었다. 나중에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어르신은 이미 여러 번 요양보호사를 교체하고 센터를 전전하다 우리 센터까지 오신 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센터로 거처를 옮겨가셨다.

철새는 계절이 바뀌면 규칙적으로 고향을 찾아오건만, 어르신의 고향은 대체 어디일까. 평생을 일궈온 당신의 집(Place)에 머물면서도 마음 누일 곳을 찾지 못해 부유하는 노년의 삶. AIP(Ageing in Place, 살던 곳에서 늙어가기)란 살던 곳에서 늙어가는 아름다운 가치를 말하지만, 현실에서의 AIP는 이토록 시리고 고독한 유랑일 때가 많다. 어쩌면 어르신에게 필요했던 것은 상처에 바르는 연고보다, 당신의 거절조차 수용해 줄 '변치 않는 고향'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소독솜을 꺼내지도, 자운고를 펴 바르지도 못했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받은 어르신의 미안하다는 전화 한 통을 '마음의 처방전'으로 삼기로 했다. 비록 내 손길이 닿지는 못했지만, 그분의 고단한 거절을 온전히 받아내는 것 또한 방문간호사가 수행해야 할 고난도의 간호임을 배운다.

떠도는 철새처럼 마음 둘 곳 몰라 방황하던 어르신의 고향은 어디였을까. 비록 이번 여정은 여기서 멈추었지만, 그분이 머무는 다음 장소가 부디 안식처가 되길 빌어본다. 나는 오늘도 초인종을 누르기 전, 가방 속에 챙긴 자운고보다 더 깊은 '인내'와 '존중'의 처방전을 가슴에 새기며 다음 문 앞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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