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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레맛곰돌이 Nov 29. 2024

38. 1995년 서울, 삼풍 - 동아시아

기억을 정리한다는 것

 나는 1996년에 태어났다. 이 사고가 있고 정확히 1년 정도가 지난 후에. 나는 이 사고를 눈으로 보고 겪지 못했다. 처음으로 이 사고에 대해 알아차린 일도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아차린 거였고.


 도서관에서 건축과 관련된 책들을 찾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내가 이 책을 왜 집었더라,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옛날에 봤던 다큐멘터리가 우연히 떠올라서라고 생각한다. 10살 남짓하던 어린 나이에 부모님 옆에 누워서 늘 봤던 주말 저녁의 다큐멘터리. 무너진 삼풍백화점의 이야기와 당시 물건을 훔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돕던 시민들에 대한 이야기.


 모든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 이 일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고 기억하는 이들, 당시 사회의 최전선에 있던 이들은 최전선에서 물러날 정도로 말이다. 옛날에는 이런 사고에 대해 다들 기억하고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자주 다큐멘터리나 방송이 만들어져 다뤄지고는 했었는데, 요즘 학생들은 이런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그런 짧은 생각들이 연이어 지나가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이 책을 집고 출납기로 다가갔던 거 같다. 잊었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자는 기분으로.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와보려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을까, 책을 만들고 싶은 지망생의 시선으로. 이 책이 사고 20년 후에 발간된 책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30년 후에 이 책을 읽고 있구나.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거나 크게 다쳤다. 사유는 후에 밝혀진 대로 설계변경, 시설물 이동으로 인한 최대 하중 초과. 이 사고를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후대에 기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 그들이 낸 답은 목소리를 모으는 일이었다. 생존자와 당시 도움을 줬던 인물들, 그리고 피해 유가족의 목소리를 모아 책으로 내는 일.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각자의 목소리를 모으는 형태로 이어진다. 특정 질문에 대해 당시 생존자, 당시 구조자, 혹은 피해 유가족들이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는데 어떤 단체를 필두로 한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이기에 몸으로 와닿는 현실성이 극대화된다고 해야 할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생생히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현장이 각자의 시선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특이한 점은 말 그대로 각자의 시선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다. 당시 현장이 어수선했고 제대로 기틀이 잡히지 않은 채로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는 만큼 모두 어수선한 분위기를 각자의 시선에서 담고 있었다. 공무원의 행동들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분개하는 사람, 수많은 시선들이 얽히고 얽히면서 직소퍼즐 피스처럼 이어지고 현장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런 개인의 시선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그림이 나온다. 어떻게 하면 이 사건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견 충돌이 그 장소에서도 있었기에 20년이 지난 지금이 되어서도 그런 의견 충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괄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는 모두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이었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는 이야기들. 우연히 지나가던, 근처에 살던, 생전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고는 해본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모두 자리에 모여 함께할 있었을까. 그것도 갑자기 무너질지도 모르는 건물 아래에서.


 최근 『자연스러운 건축』이란 책을 읽은 후에 바로 이 책을 읽었다. 『자연스러운 건축』에서는 콘크리트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처음 저자인 구마 겐고 본인의 자연 건축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할 때 우연히 콘크리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건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건축사에게 주는 으스스함에 대한 이야기였다.


노화의 정도를 표면에서 보기 어렵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내부에서 철근이 부식되고 있거나 혹은 콘크리트 자체의 강도에 문제가 생겨도 표면에서는 이것을 알아채기 힘들다.
~
반대로 콘크리트의 으스스함은 그 내용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실제 이상의 압도적 강도를 가상하고 불안정성을 고정화하는 초월적인 힘을 기대하게 된다.

- 『자연스러운 건축』21p 일부 발췌


 콘크리트는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겉으로 갈라지기도 하지만 이걸 티내서까지 행동하지 않는다. 만약 티를 낸다면 그건 정말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서야 하는 마지막 단말마다. 그렇기에 콘크리트의 으스스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지킬 것처럼 단단하게 서있지만 반대로 전문적인 건축사, 안전 관리자가 아니고서는 그 건물의 속내와 상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에 삼풍백화점 이야기가 뉴스에서 자주 언급되고는 했었다. LH 아파트 부실공사, 속칭 순살아파트 사건 때문이었다. 철근 누락, 이후 다른 아파트에서 발견된 철근 노출, 콘크리트 박락과 같은 문제점들이 재조명되면서 삼풍백화점의 공포가 떠오른 것이다. 이 모든 사고들은 사실 콘크리트라는 재료의 특성과 비슷하다. 몇 개 빼먹고, 좀 부실하게 만들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안에 쓰레기를 채워서 콘크리트를 굳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이야기는 수없이 듣지 않았는가? 공사장에서 나온 쓰레기를 처리하기 곤란해서 그냥 콘크리트랑 쓰레기를 같이 굳힌 다음 공사장에 쓰거나 주민들이 볼 수 없는 위치에 쓰레기를 가둬놓고 그냥 떠났다고.


 사실 사고의 기억은 젊은 세대만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 모두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고가 발생한 후 30년, 우리는 아직도 비슷한 상황을 보고 있다. 23년, 순살아파트 사건 당시와 그 이전에 가장 많이 나왔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는가? 아파트에서 오래 살 거면 00년도에서 10년도 사이에 지어진 아파트에서 살라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지어진 아파트들은 모두 삼풍백화점 사건의 영향을 받은 아파트라 법규를 철저히 지키면서 지어진 아파트기 때문에.


 나는 건축이란 삶의 완성이자 건축사가 풀어낼 수 있는 예술적 지표라고 생각한다. 물론 필드에 있는 사람들은 문과적 시선의 헛소리라고 일축할지도 모르겠다. 전부 돈이고 빡빡한 일정, 그리고 한정된 예산과 자원 내에서 아파트를 지어야 하니까 무슨 예술이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는데 예술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고. 그래도 네모반듯한, 옆집 뒷집과 같은 형태의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장소는 누군가가 수년, 수십 년간 살 둥지가 된다. 그런 공간을 마련하는 기회 자체가 이미 예술의 한 영역이 아닐까.


 그러니 이 사실을 생각해 주면 좋겠다. 타협과 편법은 다른 것이라고. 한정된 예산에 저급의 물감을 쓸 수는 있겠지만 물감을 쓰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예산에 맞춰 재료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재료가 빠지는, 새들이 둥지를 믿지 못해 불안해하고 결국 떠나는 그림은 없으면 좋겠다. 벌써 30년이 지난 지금, 건축 기술은 그 당시보다 훨씬 발전했는데 아직도 건물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업계가 아직 30년 전 의식 수준에서 나아가지 못했다는 의미와 같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기에 담겨있다. 우리를 기억하고 제발 앞으로 나아가자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금 울렸고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 서있다. 40년 후에는 이런 목소리가 더이상 나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까? 부디 그러기를 빈다.


 어린 시절에는 기억을 정리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매일 같은 일상을 살았고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 속 특별함이란 그날 저녁에 나온 밥반찬, 친구들과 함께 올라갔던 뒷산, 쓸모없지만 즐거운 장난들이 전부였으니까.


 많은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부터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충 20대 후반부터. 사실 20대 초반, 중반까지도 내 삶은 쳇바퀴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고 군에 입대하고, 매일 같은 일과를 보내다 가끔 나오는 맛있는 음식들에 감동하던 병사 시절, 출근하면 엔진을 고치고 집에 돌아가던, 그리고 퇴근 후에는 대학 수업을 듣기 위해 컴퓨터 앞에 늘 붙어있던 간부 시절. 말 그대로 일상이 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특별한 일들도 있었다. 주말이 오기 직전 저녁에 지인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던 일, 성당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냈던 일, 본가에서 가족들과 함께했던 일... 솔직히 당시에만 해도 이런 것들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상이 계속될 거니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기억하지 않아도 될 만큼 흔한 일들로.


 최근 병사 시절 동기생들을 만났다. 서울은 아니고 저 멀리 광양에서. 이제 우리는 광양에서밖에 만날 수 없다. 포스코에 다니는 친구가 광양에 가족을 꾸리고 살고 있기 때문에 홀몸인 아저씨들이 광양에 사는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천릿길을 내려가주는 것이다. 뭐, 대전이나 대구에 살고 있는 놈들은 경기도에 사는 나에 비하면 천릿길은 아니고 삼백리 수준이려나.


 점점 주변 지인들을 만나기 어려운 때가 오고 있다. 가족이 생기고 사는 곳이 멀어진다. 대구 패밀리가 불렸던 형님들은 이제 브라질, 울산, 경기도 그 어딘가에 각자 나눠져 살고 있고, 병사 시절 동기생은 경상도와 전라도 그 어딘가에서, 보드게임 패밀리조차 경기도와 서울, 외곽과 외곽으로 나눠져 큰맘 먹고 모이지 않는 이상 얼굴 보기도 힘들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기억은 한참 예전의 이야기로 점점 변해가고, 이제는 따로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기억해 낼 수 조차 없게 되어간다.


 나는 내 성인의 기억을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20년이 지난 후에 목소리를 정리했는데 그 사이 얼마나 많은 목소리들이 잊혀지고 소실되었을까. 사고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은 또 얼마나 많은 목소리들이 소실되었을까. 이제는 소실되는 기억들이 두렵다.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더라? 라는 질문에 1년, 2년이던가... 한참을 떠올리며 기억을 짚어가는 순간들이 두렵다. 아마 30대, 40대가 되면 더 심해지겠지. 내가 목소리를 남기는 것처럼 그들의 목소리도 남고 남아, 내 기억은 나만 가져가더라도 그들의 기억은 많은 이들이 가져가는 사회가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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