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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레맛곰돌이 Dec 23. 2024

42. 책 도둑의 최후는 교수형뿐이라네 - 알마

애서가의 길에 끝은 없다.

 어린 시절에는 방 하나를 책장으로만 채우던 영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부러웠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집을 구할 수 있을까, 빈티지한 고동색 책장에 책을 가득 꽂고 싶은데. 세상에 얼마나 예쁜 책이 많은지 저런 방을 가지면 책장 가득 색을 맞춰 예쁜 책들을 꽂아놓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고, 당연하지만 그 꿈이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도 늦지 않은 때에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애독가 말고 애서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한국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애서가일 거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책을 모으고 꽂아놓고 책장에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 아름다운 책장을 만들고 싶고 내 책을 소유한다는 포만감에 만족하는 사람들. 사실 내 이야기다. 내 책을 가지고 싶고 언젠가 깨끗하게 꽂아둔 내 책들을 도서관에 기증하고 싶다.


 오늘의 이야기는 나 같은 인간들을 위한 이야기다. 아마 위의 이야기를 읽고 잊었던 자신의 꿈을 떠올리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 나와 같은 애서가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애서가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이사 갈 때마다 얼마나 삶이 고달파지는지, 책장에 꽂아둔 정든 책들을 정리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지 아는 이일 거라고도 생각하고. 오늘 가져온 책은 애서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다. 옛날의 애서가들은 어떻게 '내 책'을 이야기했을까. 장서표라는 말이 익숙지 않다면 장서인이라는 말은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장서인을 떠올리며 글을 따라오면 좋겠다.




 장서표는 말하자면 '이 책은 내 책이다.'라는 징표와 같다. 책 주인의 이름, 책 주인의 삶과 흔적이 담긴 그림, 그리고 장서표를 만든 판화가의 서명이 들어간 징표인데 책에 이를 붙임으로써 어떤 이가 읽었던 책인지를 알리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말해도 한국에서는 굉장히 낯선 개념일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장서표보다 장서인이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책들을 떠올려보면 가끔 도장 같은 찍혀있는 책이 있었음을 떠올릴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어떤 이가 책의 주인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도장인 장서인이다. 즉, 다른 형태로 비슷한 개념의 물건들이 동서양에 모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책에서는 저자가 모은 수많은 장서표 중 뜻깊은 장서표 100개를 뽑아 해당 장서표에 담긴 이야기, 혹은 자기가 이 장서표를 얻기 위해 겪었던 이야기, 당시의 시대 상과 그림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애서가로 유명했던 찰스 디킨스의 장서표부터 수많은 영국의 문인들이 활동했다는 작가 클럽의 장서표, 도서관 도서 기증자, 기부자를 위한 특별 장서표와 공공기관의 장서표까지 그가 모아 온 장서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 사실상 서양 애서가들의 역사를 비추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다.


 내가 맨 처음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나도 -이사를 가면서 책을 몇 번씩 남들에게 나눠주고 기부해 내 책장을 지키지 못했지만- 애서가로서 '내 책'이라는 것을 보일 수 있는 장서표에 관심이 갔고, 또 장서표에 찍힌 판화들이 당시 작가들의 모습을 비춰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장서표의 그림은 화려하고 대단한 것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장서표도 많지만 심플한 것들도 많고 때로는 시대의 분위기에 맞춰 장난스럽고 재미있는 삽화가 그려진 작품도 있다는 의미다.


 19세기말, 각진 방패와 용맹한 사자, 그들의 삶과 인생이 보이는 열린 서재와 독서대, 그리고 수 없이 놓인 깃펜과 잉크병. 그 아래에 길게 깔리는 격언. 저명한 작가, 애서가들의 9cm짜리 장서표에는 서양화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 이런 다양한 장서표를 봤을 때 나도 내 장서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 책에 장서표까지 붙이며 보관하기에는 자신 몸 뉘일 장소 구하는 것도 여의치 않은 시대에 무슨 장서표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애서가의 삶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책 추천사에서 봤던 한 이름이 떠올랐다. 바로 국내에서 장서표 판화가로 유명한 남군산 작가였다.


 최근 '창비 부산'에서 남궁산 작가 장서표 판화전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 장서표 판화를 만들고 있는 작가는 극히 소수이며 그중에서도 활발히 활동을 하는 작가는 남궁산 작가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그를 이 책 이전에도 한 뉴스 인터뷰로 본 적이 있었다. 유명하지 않은 한국의 장서표 문화가 언젠가는 유행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며 많은 이들에게 장서표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사실 당시의 나는 장서표까지 욕심이 닿지 않았다. 그때는 한참 군생활을 하고 있을 때여서 책을 고의적으로 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했다가 책과 같이 살고 싶다는 욕심에 이 길을 포기할까 봐(하지만 결국 책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에 그 길을 포기하고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살던 도중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들었는데 그는 여전히 많은 한국 작가들의 장서표를 만들고 있었다.


 그가 만든 작품 중에서 나는 김훈 작가의 장서표가 유달리 눈에 띄었는데, 사실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펼쳐진 책 위에 올려진 연필과 자전거가 몽당연필 무사으로서의 그와 자전거 괴인으로서의 그를 너무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해서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남궁산 작가의 작품에는 한국적인 색채가 녹아있다. 서양의 장서표처럼 정교하고 세세한 맛은 없지만 부드러운 곡선과 한국적인 색채, 그리고 주인의 이름을 지워도 주인이 보이는 듯한 장서표는 책에서 봐온 것들과 다른 감정을 일으켜 처음에는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보면 볼수록 정이 들게 된다.


 애독가, 애서가는커녕 성인이 일 년에 책을 한 권 겨우 읽는 시대, 집에 책장 하나 놓을 공간이나 마련하면 다행인 시대에 장서표의 유행은 점점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다. 남궁산 작가 이후에 장서표를 만드는 판화가가 또 있을까. 마치 전통 부채를 만드는 장인이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그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후에는 장서표라는 걸 기억하는 이들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문득 그런 불안함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처럼 책이라면 끔뻑 죽는 이들이 남아있다면 장서표도 계속 그 수명을 유지하지 않을까, 오히려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애서가란 그런 존재니까.




 내 책장을 크게 가지고 싶다. 지금처럼 컴퓨터 옆 이동용 트레이에 마련한 작은 책장이 아닌 한 벽면을 가득 채우는 고동색 책장을 가지고 싶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장서표를 만들어 내 책에 붙이고 싶다. 아니, 책장을 가지지 못하더라도 장서표만은 만들고 싶다. 그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책과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아서. 편집자로 취직한다면 그때는 고려해 볼지도 모르겠다. 금액이 너무 쌔면 꿈으로만 내버려 둘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의 애서가들이 문구용품에 관심을 가지고 만년필과 잉크에 환장하는 것처럼 당시의 애서가들에게는 깃펜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애서가의 장서표를 보면 늘 깃펜이 하나씩은 얹어져 있다.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그리고 21세기에도 애서가들은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글자를 좋아하고 사랑했구나. 시간이 흘러도 무언가에 빠진 사람들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대를 초월한 연결고리가 생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장서표를 만든다면 그때는 노란 곰 하나를 그려 넣고 싶다. 손에 올리브 가지를 든 노란 곰. 나는 많은 게 되고 싶었고 그 수많은 꿈들 중에는 신부님이라는 꿈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따라 성당에 갔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복사 생활을 했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내 생각과 뜻대로 성당에서 기도하고는 했다.


 예전에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만약 멀리 떠나 성당을 나오지 못하게 되더라도 언제나 하느님을 가슴에 품고 기억하며 살면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비겁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나를 떠올리며 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꽤 오랜 시간 냉담을 하며 성당에 가지 않고 있다. 주말을 같이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을 위해 주말을 쓰다 보니 멀어지게 되었다. 함께할 사람이 없어진 지금은 나가지 않는 관성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굴러가고 있고. 이런 나도 올리브 가지를 들 수 있을까. 허락된다면 내 장서표에서만큼은 올리브 가지를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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