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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레맛곰돌이 Jun 17. 2024

오늘은 일정대로 살지 못했어

"한국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 살아. 자유로울 때 자유를 즐기라니까?"


 S대학교 화공과를 나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업의 브라질 주재원으로 일하는 아는 형의 이야기, 잠깐 이거 언젠가 쓴 말 같은데. 오늘이 끝나기에는 10시간이 남았지만 자동차를 고친다고 3시에 검도를 가지 못해서 마음이 상했다.


 그 형은 지금 브라질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마지막 배웅 삼아 술 한 잔 걸쳤지만 그 후에는 늘 그렇듯 연락이 뜸하다. 12시간 밖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 우리가 잠자리에 들 때 그는 일을 하고 있고, 그가 연락을 할 때 우리는 저마다의 아침을 맞이하고는 한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가 공공연해져서 거리가 멀어지더라도 우린 언제나 함께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12시간이란 벽 앞에 메신저는 무력한 모양이었다.


 오후 3시, 모두가 일하는 시간에 나는 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지난 주말 만난 친구들은 이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내가 부럽다던데, 9년의 세월을 아직 이겨내지 못한 건지 나는 아직도 둥지 없는 뻐꾸기마냥 둥지를 찾아 날갯짓을 하고는 한다. 오늘 저녁에는 릿터 읽기 수업이 있는데. 옛날에 릿터에서 새 박사님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했나, 그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하고 싶은 질문이 생겼다. 내 질문을 받아 줄 사람은 없지만.




 최근 검도를 다시 시작했다. 아니, 다시 시작했다고 하기에는 쉰 기간이 너무 길어 처음부터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내가 검도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위에서 아래로, 마음을 비우고 내 머리 선을 따라 올곧게 검을 내리면 되니까.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검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코로나 이전에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검도를 즐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왜 일찍 검도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지? 싶을 정도로 검도를 즐기고 있다.


 검도가 내 일정의 전부는 아니다. 월요일이면 한겨레교육센터에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고, 다른 날에는 읽으려고 쌓아뒀던 책들을 하나씩 꺼내 읽어야 한다. 최근에 다 읽은 책은 "나는 죽음 앞에 매번 우는 의사입니다."라는 책이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e북리더기 카페에서 서평 이벤트를 했기에 신청해서 받은 도서인데, 최근 의료에세이에 관심이 생겨 신청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골든아워",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같은 의료에세이지만 전혀 다른 색채를 보여준 두 책처럼 이번 도서도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켜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다 읽었으니 서평까지!라고 하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후에 봐야 하는 다큐멘터리가 따로 있기 때문에.


 서평을 작성하기 전 보고 있는 다큐멘터리는 "배드 닥터 : 메스를 든 사기꾼"이라는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다. 과거 TV에 나왔던 혜나라는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찾으려고 해도 못 찾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야기이고, 이제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 혜나는 SKY캐슬에 나오는 혜나뿐일 테니. 과거 식도가 닫힌 채로 태어났지만 식도 끝이 폐와 연결되어 있어 기적적으로 생명을 이어가던 아이가 있었다. 현대 과학으로 그녀를 도울 방법은 없었고, 그녀는 평생 식도에 튜브를 꽂은 채로 생명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웨덴의 한 의사가 그녀를 도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바로 목에 플라스틱 튜브를 집어넣어 인공 기도를 만들고, 줄기세포를 통해 이를 신체 일부분으로 결합시키는 방식의 치료를 한다는 전설적인 인물, 파올로 마키아리니. 과연 그녀는 치료를 받은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이 이야기를 서평에 담고 싶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만 죽음 앞에서 울고 쓰러지는, 하지만 다시금 일어나는 의사들과 파올로 마키아리니에 대한 이야기. 수술대 앞에서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신도 아닌 의사뿐일 텐데 아직 시도된 적 없는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환자들, 어머니의 배 밖으로 나오자마자 위험에 처하고 1kg도 되지 않는 몸으로 수술을 받는 아기들, 거기에 혜나의 이야기까지. 서평을 기대해 주면 좋겠다.


 앞으로 1시간 후에는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한다. 신촌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퇴근길의 서울은 언제나 막히고(이럴 때마다 '올림픽 대로가 막혀요~ 지금은 어딜 가도 막혀요~'라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그 사이를 뚫으며 종횡무진하는 버스기사님의 실력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리고 나는 그 버스에 올라탄 콩나물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흐드러지게 피다 신촌에 떨어진다. 오늘은 또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까. 사실 지금도 오늘 수업에서 할 이야기를 생각하며 웃고 있다. 둥지를 떠난 새에게 마주치는 동류와 함께 하는 지저귐은 사막의 단비와도 같으니까.


 지난 주말에는 여의도부터 파주까지 발길이 닿는 대로 쏘다녔다. 옷과 신발을 사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고 옛 중학교 동창들과 어울리는 것이 부수적인 목적이었는데 주객이 전도된 건지 여의도에서는 물건 하나 사지 못했고, 결국 한강 둔치에서 맥주나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30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비눗방울을 꺼내는 그녀, 나도 그녀처럼 동심을 잃지 않고 살고 있을까. 결국은 나도 장난감을 빌려 10년 전에도 하지 않았던 비눗방울을 불었다. 꿈, 희망, 미래, 무언가. 비눗방울이 날아가는데 괜스레 멀리 날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손풍기로 비눗방울을 하늘로 띄웠고, 결국 그것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고 차를 끌었다. 라떼는 말이야! 주말에 선배 결혼식이 있으면 구두 신고 2시간을 달려 강릉까지 가고는 했어! 진짜 그랬다. 옛날에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구두를 신고 2시간을 달렸다. 오늘 오랜만에 구두를 신고 아침 러시아워를 뚫는데 긴장감이 올라온다는 게 발바닥 아래부터 느껴졌다. 괜히 가죽구두 신고 운전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제발 갔다가 집에만 돌아오게 해 주세요. 열심히 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진짜 목숨이 붙어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자유로에서는 꽉 막힌 마음을 풀 겸 140은 밟으면서.


 6월도 벌써 중반을 지나고 있다. 7월에는 뭘 할까. 기회가 된다면 경상도에 있는 서원들을 둘러보고 싶다. 카메라만 둘러메고 차를 끌고 다니면서 서원 촬영, 솔직한 말로는 기회가 없으면 좋겠다. 그냥 이 정도는 꿈으로 남긴 채 먼 미래에 내가 무언가 이루고 난 후에 다시금 떠올리면서 도전할 수 있을 그날을 기리게 되면 좋겠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 6월 말에는 서울 국제도서전이 있고 8월에는 캐리비안 베이를 가고 싶다는 동창의 말에 따라 캐리비안 베이를 가야 한다. 9월에는 펜션을 빌려서 1박 2일 여행을 해야 하고. 솔직히 캐리비안 베이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가고 싶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따라가야지. 문제는 내 배다. 지금 캐리비안 베이에 갈만한 몸뚱이가 아니라서 8월까지 살을 좀 빼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 검도 끊기를 잘했네, 지난 주말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스스로를 칭찬했다. 시답잖은 이야기지만 지금 내가 열심히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체호프 희곡선을 전부 읽는다면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오늘도 뉴스를 읽으면서 이슈 거리들을 체크했으면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검도를, 수업을 들었다면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한테 열심히 살고 있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었으니까, 앞으로도 하고 싶어서 할 일을 찾고, 또 하자. 


 오늘 하고 싶어서요.라는 말을 번밖에 못 해서 슬프다.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놈이었는데. 수업 끝나면 노래방이나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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