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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yking Jan 22. 2022

서른살, 우울의 원인에 대한 고찰(21)인생의 정답?

#21. 인생의 정답을 찾아 헤매는 길 위의 우울감


#20대의 잘못된 정답 찾기

20대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인생의 정답’을 찾는 데에 몰두했다.

- 시대의 가장 좋은 전공이란 무엇일까? 

-나의 전공에서 고를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은 과연 무엇일까?

-가장 좋은 배우자란 어떤 사람일까? 어떤 남자를 만나야 하는가? 


다소 미련하게도, 나는 누구나 ‘정답’으로 인정할만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의 인생의 답’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정작 중요한 그 한 글자 ‘나’를 빼먹었던 것이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그런 보편적인 인생의 답안지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많은 시간 동안 그 답을 찾는 길에 서성이며 괴로움을 겪었다. 시간이 흘러 조금은 더 지혜로워져 정답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결국은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었어야 했는데, 아무런 이해도 못한 채 이미 내가 서른이 었다는 사실에 온갖 불안과 우울감에 휩싸였다. 그동안 내가 열심히 일구고 있던 답도 결국 나에게 정답이 아닌 것만 같이 느껴지고, 그렇다면 다시 어떤 다른 답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봐도 내 것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없었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이젠 정말 알아차렸을까?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머리로만 이해하였을 뿐, 조금만 방심하면 여전히 관성적으로 정답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인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아, 맞다.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한 선택을 정답으로 믿고 일구어 나가는 것이 인생이지.’


20대의 나는 수많은 시간 동안 정답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생각해보면 필기시험에서 헷갈리는 문제 하나를 만나도 2번이냐, 3번이냐를 두고 헷갈리는 순간을 맞닥뜨리면 오만상 인상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고민하며 신중하게 답안을 고르는데, 하물며 단 한 번뿐인 인생의 중요한 방향을 결정하는 순간들에는 얼마나 그 마음이 괴로울지 너무나 당연하여 자세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평소 생각과 고민이 과다하기로 유명한 나는 정말 많은 순간 괴로움에 파묻혀 지냈다. 선택의 순간 고민을 하다 두통이 나기 시작하면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제발 누가 나한테 삶의 정답을 좀 알려줘!! 그 답안지를 좀 보여줘! 그럼 나 정말로 열심히 할 자신 있어요.’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부모, 교수, 선배 또는 나보다 지혜로워 보이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도 하고, 요즘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mbti검사에 매달려 진로를 탐색해보기도 하고, 어쩔 때는 사주를 보러 가 내 연인과 결혼 궁합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조언도, 그 어떤 과학적인 검사지도, 그 어떤 영적이고 운명적인 알고리즘이 불러다준 답에도 나의 속은 후련하지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답은 오로지 내 마음속에 있고, 나는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부족하니 말이다.



#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라고 말하는 유튜브를 시청하며 느끼는 우울감

요즘은 각종 SNS 매체들이 발달하면서 적은 자본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법이 늘게 되면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 성공한 1인 기업가, 퍼스널 브랜딩에 성공한 젊은 청년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들은 조언한다. ‘좋아하는 일’을 ‘꾸준하게’ 밀고 나가보라고 말이다. 더 이상 사회가 만들어둔 틀에 갇혀 주인의식 없이 반복되는 출퇴근의 삶을 살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라고!

자기 계발을 향한 많은 주옥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정확하게 알려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이를테면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을 때는 어떻게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가?’에 대한 것 말이다. 그 간단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리고 여태껏 나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은데 아직도 왜 나 자신을 잘 모르는지 조차도 모르겠다.

  

#열정은 준비되어 있는데... 분명한 목표는 없다?

 목표가 없는데 열정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을 하자니 조금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정말 그랬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고, 그곳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열망은 가득했고, 늘 진심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는 부재했다. 서른쯤 되니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목표는 나의 목표인지, 사회가 나에게 강요하고 주입시킨 목표지 조차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기 계발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성공한 위인들은 나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지 않는다는 다소 절망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파악하고,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소신을 가지고 그들의 특유의 창의력과 꾸준함으로 그 길을 갈고닦았다. 진심으로 그 삶이 부럽다. 나는 왜, 어쩌다 하고 싶은 게 없을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에서  ‘꿈이 없어 괴롭다’며 고민 상담을 하는 에피소드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그 사람에게 왜 꿈이 있어야 하는지 오히려 반문하셨다. 꿈이 없어도 괜찮고, 많은 사람들이 꿈이 없다고. 그러나 사회에서는 마치 꿈이 있어야 바람직한 것처럼, 꿈이 없으면 잘못된 것인 마냥 만든다고 하셨다. 생각해보니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사회에 너무 많이 물들어버렸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꿈의 부재는 여전히 괴롭고, 자괴감이 들게 하기도 하며, 간절히도 꿈을 찾고 싶어 진다. 그리고 이미 서른을 넘어버린 나이 때문에 조바심까지 난다. 이제 꿈을 운운하기엔 슬슬 늦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의 마음이 들어서다. 인생의 많은 숙제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나이 서른에 ‘꿈’이라는 다소 현실감이 떨어지는 무언가를 위해서 모든 톱니바퀴들을 정지시킬 용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인생 선배님들의 성공담을 많이 듣긴 하였으나, 서른 즈음에 이러한 불안감이 몰려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니까 이것저것 부딪히고 무모해질 수 있던 20대라는 기회는 분명 이미 지나갔다.

20대의 나는 좀 더 치열하게 스펙을 쌓고 공부를 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하는’ 공부를 절실히 했어야 했다. 그것을 미루어두니 이렇게 뒤늦게 30대에 ‘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난 왜 태어났을까?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다 보면 결국 나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해진다. 나라는 이 물리적인 육체, 이 육체에 깃든 영혼, 그리고 육체와 영혼이 한 팀(?)이 되어 지난 인생을 30년간 살아내며 마주한 모든 인간들, 사물들과의 관계에 대한 경험의 복합체는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사고 회로에 따르는 감정과 가치관을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이 문제에 있어서 나 자신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해진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왜 태어났고,

나는 인생을 살아가며 무엇을 중심으로 둘 것인가?


 간단해 보이지만 어느 하나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나는 그동안 30년이 넘게 살아오면서 오만가지 관계와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고 평가하고 분석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는 정성을 많이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좀 꼰대 같은 말이지만, 나보다 어린 사람이 내게 단 하나의 인생의 조언을 구한다면 나는 20대에 나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처음 골랐던 답이 더 이상 내게는 답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때

서른쯤 되면 어떤 형태이든 기존에 골라서 달려오던 길을 다들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지난 십수 년을 투자한 그 길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것은 직접 몸소 경험해보니 생각보다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수도 있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으나 어떠한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여 그 꿈에 입문도 하지 못하고 막혀버리는 때도 있다. 그리고 괴로운 순간에 직면한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애정 하며 꿈꿔오던 이 길은 나에겐 정답이 아님을 인정하고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한마디로 '현명한 포기'랄까.


 그러나 이전에 골랐던 답지는 노력과 세월로 얼룩져 항상 여전히 매력적이다. 이미 내 지난 세월에 녹아들어 왔던 정답을 다시 오답이라 인정하고 지워내는 일은 머릿속과 마음속의 많은 구조물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빼내는 것과 비슷한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답은 유동적이며, 바뀔 수 있다. 혹은 바꿔야만 하는 걸 수도 있다. 지난 시간 동안 내 성격이 변했고, 내 환경이 변했고, 내 태도도 변했다. 내 의지력도 변할 수 있고, 내 건강도 변할 수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중요한 건 내 마음속의 ‘인정하기’이다. 재빨리 답을 변경하는 것도 현명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동반되는 우울감은 불가피하다. 열정을 많이 담았을수록 우울감은 더욱 커진다. 어쩔 수 없는 수순이긴 한데, 그것이 얼마나 오랜 기간 내 삶에 먹구름을 가져오는지…. 그저 끊임없이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 없다. 이 구름이 걷히고 나면 나는 더욱 초연해지고 단단해지리라. 나만의 답을 일구어 나가야 하는 그 길은 괴로운 순간들의 연속이지만, 답을 찾는 과정 자체를 즐겁게 여기는 지혜를 가지도록 마음을 단련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내 선택은 ‘나 자신’부터 믿고 지지해주자 제발 좀.'


 우울감이 걷힐 때쯤이면 다짐하고 또 다짐해본다. 정답이냐 아니냐는 내 마음에 달렸고, 나는 현명하게 판단하여 그 답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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