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번지의 벽 1
오래된 상가들을 이리저리 돌아서 마침내 최 씨가 운영하는 부동산중개소에 도착했다.
은하의 아버지 배 교수는 거기에 딸린 방 하나를 수리해서 ‘연변 조선인 향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삐거덕~ 소리가 길게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은하를 따라 들어간 사무실은 담배연기가 자욱한 열 평 남짓한 부동산 사무실이다.
이때 60대 초반의 중년 남자들 세 명이 장기를 두다 말고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아저씨들, 안녕하십니까?”
은하가 수줍은 미소를 띠며 목례로 인사하자 다들 반갑게 은하를 맞이했다.
그중에서도 헌칠한 키에 비쩍 마른 체격에다 콧수염까지 길러서 더욱 촌스럽게 보이는 사내가 일어나면서 은하를 반겼다.
“야, 반갑다야. 우리 은하 한 2년 만이지? 그새 더 예뻐졌네. 북경물이 좋기는 좋은가보다야.”
“최 씨 아저씨, 건강하신 모습 뵈니까 무척 반갑습니다.”
“이제 아주 내려온 거지? 근데 같이 오신 이 신사 분은 누구신가? 우리 은하 애인이신가?”
바로 이 사람이 조금 전 은하로부터 들었던 최 씨라는 사람임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얼굴 어디에서도 자신의 딸로 인한 어두운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저씨의 실없는 농담 때문에 얼굴이 다 빨개집니다.
예, 아저씨 보고 싶어서 아주 내려왔습니다. 참, 선생님. 인사하십시오.
여기 계시는 최 씨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 친구 분이시고, 이쪽 두 분은 우리 동네에 사시는 이웃 아저씨들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윤준노라 합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다들 내 얼굴을 한 번 더 유심히 들여다봤지만 그다지 반가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저씨,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방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아마 자고 있을 거야.
요즘은 몸이 예전 같지 않은지 소주 몇 잔만 마셔도 몸을 못 가누니 쯪쯪!
한 보름쯤 됐을 거야.
한 달 전에 있었던 분기토론회 건을 따지겠다며 창우가 다녀간 뒤부터 평소 안 하던 낮술을 한두 잔씩 하더니만,
요사인 거의 매일 거르지도 않네.
둘이서 다퉜다더니만 속이 많이 상하는 모양이야.
이제 우리 은하가 왔으니 몸 좀 챙겨드리라고. 저렇게 술을 못 이겨서야, 원!”
최 씨의 안내로 좁은 통로를 지나 사무실 안쪽에 붙어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술과 담배에 찌든 쾌쾌한 냄새가 방 안으로부터 확 풍겨 나왔다.
그러나 방안만큼은 가지런히 잘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서너 평 남짓한 작은 방에는 낡은 장롱하나에 제법 큰 앉은뱅이 나무책상이 놓여 있다.
벽의 한 면을 가득 채운 서가에는 중국의 새로 나온 역사교과서며 고구려 발해와 관련된 각종 연구발표 논문들과 관광안내 책자들이 종류별로 빼곡히 정돈돼 있었다.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은 벽에 걸려있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동북삼성이 잘 나타나있는 대형지도였다.
백두산을 따라 토문강 송화강 흑룡강까지 붉은색으로 선을 그어놓았는데 그것은 동간도지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선 안에 파란색 붓글씨로 고토회복(故土回復) 지역이라고 적어 놓았다.
한눈에도 배 교수란 분이 예사로운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봐, 배 교수. 일어나 봐. 은하가 왔어.”
은하 아버지는 온기도 없는 방바닥에 이불 한 짝만을 깔고 옆으로 누워서 자고 있었다.
최 씨가 옆구리를 여러 차례 흔들어 깨우자 부스스 일어나더니 자리에 앉았다.
며칠 동안 깍지 않은 수염에다 술에 찌든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부릅뜬 황소의 눈처럼 힘이 넘쳤다.
“자 그럼 대화들 나누라고.”
최 씨가 방을 나가자 비좁던 방안이 다소 넓어 보였다.
은하 아버지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두툼한 두께의 오래된 검정색 뿔테안경을 쓰고서야 나를 알아보았다.
은하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세요.”
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윤준노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그는 뿔테안경을 왼손으로 들어 올리며 그 큰 눈동자로 노려보듯 쏘아보았다.
“그렇게들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요, 너도 앉거라.”
은하가 장롱에서 방석 하나를 내어와 나에게 권했다.
난 방석 위에 앉았으나 은하는 맨바닥상태 그대로 반 무릎을 한 채 내 옆자리에 앉았다.
“윤 선생이라? 그래 우리 은하와는 어떤 관계이신지?”
딸과 함께 온 낯선 남자에게 던지는 당연한 첫 질문이었지만 순간 난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를 몰라 당황했다.
은하가 대신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한동안 그렇게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윤 선생님은 한국에서 오셨어요. 동북아역사재단이라고 한국정부 산하 기관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공무가 있어 연길에 오셨는데 아버지를 만나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배 교수는 은하로부터 나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말을 들은 후,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다 말고 물끄러미 날 다시 쳐다봤다.
담배를 피우겠느냐는 눈치였다.
정말 담배 한 대가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었지만 난 정중히 사양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은하야 거기 창문 좀 열어라.
환기를 시켜야겠다. 방이 좁아서 환기가 잘 안 돼.”
은하가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방안의 쾌쾌한 냄새가 삽시간에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녹차를 준비하러 은하가 부엌으로 간 사이였다.
은하아버지가 큰 성냥갑에서 꺼낸 성냥으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천장을 향해서 길게 연기를 내어 뿜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라…. 거기서 일하시는 연구원이시다….
그건 그렇고 한국에서 중요한 공무 차 오신 분이 바쁘실 텐데,
하릴없이 지내는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 여기까지 찾아오셨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 민족의 올바른 대응책에 대하여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