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한국에서 '언어천재 유튜버'로 크게 홍보하는 어떤 분에 대한 논쟁이 올라온 적이 있다. 한국에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모인 커뮤니티라서 그런지 논쟁은 매우 뜨거웠다. 요지는 그분이 스스로를 몇 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천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높은 수준의 제2 외국어를 구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개인적으로 나도 이탈리아어를 잘 못하지만서도 그분이 구사한다는 이탈리아어를 좀 들어봤는데 귀가 조금 트인 내 입장에서 원어민 수준이라고 말하기엔 많이 부족해 보였다. 물론 다른 언어들도 잘 구사하신다 하시니 이탈리아어는 좀 부족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라는 것은 쉽게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조금 더 효율적인 학습법이 있을 뿐 그 언어를 마스터하는 천재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를 공부하고, 인류학을 공부하고, 어원을 공부한다고 한들 그것들이 미치는 영향은 언어라는 큰 산을 오르는데 조금 도움이 되는 에너지 초코바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기분전환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어가 영어와 다른 점 : 너무나도 많은 격변화
이탈리아어는 격변화가 논리적이면서도 매우 많다. 일단 1~3인칭으로 변화하고, 이것이 복수 단수로 변화하기 때문에 기본 6 격을 지닌다. 과거형은 영어와 다르게 반과거(불특정 한 과거)와 근 과거(확실한 시점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과거), 원 과거(먼 과거의 이야기,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거) 이렇게 있고 여기에 대과거는 essere나 avere의 반과거 + PP 형태로 변화하며 두 시제가 겹칠 때 더 먼 과거를 뜻한다. 여기에 표현을 부드럽게 하는 조건법도 반과거로 형태 변화를 하기 때문에 조건법도 반과거와 대과거로 표현이 가능하다. 이는 접속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형태로 변화하기에 영어에서 과거형 만들기 위해 have + PP나 ed만 붙이면 된다는 식으로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변화하는 모든 형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결코 외워서 수학공식을 도입해 풀어내듯 할 수가 없다.
하다 내지는 만들다 동사인 Fare의 격변화
이 수많은 형태를 다 외워서 외운 것을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한국어도 어미가 변화무쌍하게 바뀌기 때문에 이점은 한국어나 이탈리아어가 조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우리는 한국어를 발화할 때 어미변화를 생각하면서 발화하는가? 당연히 답은 아니다. 우리는 한국어로 어미변화를 하는 것이 익숙할 뿐이지 그것을 암기한 후 생각해서 발화하지 않는다.
결국 익숙해져야 한다.
언어에 익숙해져서 별다른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발화가 되면, 그냥 생각이 말로 나올 수 있는 단계가 될 때에 우리는 그 언어를 마스터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그 언어에 익숙해질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처음 말을 배우는 아기라고 생각해본다면, 엄마는 아기에게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의미를 전달해주고 아이는 그 소리를 계속 받아들이면서 엄마의 표정과 몸짓을 소리와 결부시켜가며 말을 배워 나간다.
아무리 어원을 많이 알고, 그 나라의 문화에 빠삭해도 언어는 그 자체로 소리와 의미에 익숙하지 않으면 말이 나오려고 해도 나오지 않는다. IQ나 두뇌회전의 여하에 따라서 습득 속도가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리 천재라도 들어보지 못한 말은 "들어보지 못한 말"일뿐이다.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탈리아어로 Mongolfiera라고 말했다면 그 사람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Mongol이 들어갔으니까 몽골 지역 아시아 사람 이야기 일 것이고 Fiera는 이탈리아어로 공부해보니까 전시회 이런 것이니까 음... 이것은 어원을 생각해보면 몽골인들의 전시회인가?
Mongolfiera
Mongolfiera는 사실 열기구라는 뜻이다. 어원은 프랑스어인 Montgolfiere에서 왔다. 이처럼 어원 학습이라는 것도 사실은 정확하지가 않다. 어원을 잘 안다고 언어를 마스터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어원은 너무나 많고 너무나 복잡해서 참고만 해야 할 뿐이지, 몇 가지 어근과 어미를 외웠다고 결코 그 언어의 본질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많이 쓰고, 노출되고, 익숙해지면 굳이 어원에 대한 것은 흥미 정도로 생각하고 배우면 되는 것이고 굳이 어원을 몰라도 말을 하는데 큰 문제는 없다.
이탈리아어 학습의 가장 큰 실패 : 듣기를 간과한 점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하는 언어 학습법 유튜브 채널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영서당 TV라는 곳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존쌤(?)이라는 외국인 분이 운영하는 채널이다. 존이라는 분은 미국인으로 한국어를 5년 동안 학습하고 터득한 언어 학습법에 대해서 유튜브를 올리시는 분이고, 영서당 TV는 아마 EBS 영어강사를 하시는 분이 운영하시는 채널인 듯하다. 개인적으로 일면식도 없는 이분들의 학습법을 유튜브를 통해서 찾아본 이유는 이탈리아어 학습이 너무나 지지부진하고 느리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영어로 업무를 해야 하는 직장에 있고 영어는 그래도 잘하진 못해도 어느정도 한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자신만만했던 것과 달리 이탈리아어가 너무 늘지 않았다.
이탈리아어 문법도 공부하고 회화책도 사서 공부하고 했지만 여전히 밖에서 생활할 때 무슨 소리 하는지 들리지도 않고 이탈리아어로 표현도 하지 못했다. 처음 Comprehensible Input이라는 것을 접하고 그때 깨달았다. '아 나는 영어를 정말 오랜 기간 동안 배워왔지만 이탈리아어는 노출이 극히 적었구나.'
이탈리아어는 영어와 다른 언어다. 그리고 처음 배우는 언어였다. 이에 필요한 것은 아기가 된 심정으로 이탈리아어에 대한 노출을 최대한 늘려서 익숙해지는 것이 방법이었는데도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노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 소리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어 MP3 수록 교재에서 MP3를 듣지 않고 책만 쳐다보았던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다. 소리를 모르니, 사람들이 하는 말도 모르는 것이었다.
영서당 TV와 존쌤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듣거나 읽는 것을 통해서, 또는 보는 것을 통해서 최대한 노출을 늘려라는 것이다. 문법책만 잡고 있지 말고 다른 책만 잡고 있지 말고 최대한 더 듣고 이해하면서 언어환경에 노출되라는 것이다. 노출환경에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소리다. 소리가 있고 활자가 생겼기 때문에 활자를 보고 소리를 듣는 것은 순서에 맞지 않는다. 물론 의미를 알고 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소리가 활자보다 더 중요하다. 활자가 더 많은 정보를 쉽고 빠르게 전달해주는 장점이 있지만 내가 그 소리를 모르면 평생 나는 그 단어를 "모르는" 것이다.
듣기와 읽기 교재를 함께 하자 : Audible
자신이 느끼는 언어 수준은 어학점수가 이야기해주지 않고 오직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것에서 온다. 내가 다른 이들의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때, 활자에 적힌 외국어가 더 쉽고 재미있게 다가올 때의 그 희열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지금 내게는 그러한 희열이 조금씩 발생하고 있어서 글을 듣고 읽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최근 완독에 가까워진 소설 Prima di noi, 총 886페이지에 달한다
이 책을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읽으면서 들었다. 이탈리아는 아직 Audible이 미국처럼 활성화되어있지 않지만, 몇몇 소설책들이 Audible로 나와서 아마존에서 만든 이 앱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들으면서 읽고 또 듣는다. 물론 100% 속도로는 아직은 어려워서 80% 정도의 속도로 듣고 있다. 이 책을 시작하기 전에 어린이 책들을 Audible로 함께 듣고 또 들었다. 점점 수준을 높였다. 아직도 100% 이해한다 말 못 하지만 그래도 소설의 큰 줄거리가 이해가 간다.
물론 중요한 단어들은 찾아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Sbirciare(엿보다)라는 단어를 모르면 그 상황의 긴박함이나 위중함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또는 Un uomo in gamba를 찾아보지 않으면(뜻은 건강한, 능력있는 남자) gamba는 다리일 뿐인데 도대체 어떤 뉘앙스로 이야기한 것인지 헛갈릴 수 있다. 물론 하나하나 찾아보기보다는 들으며 큰 줄거리를 이해하되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이해에 방해가 된다면 그때 단어를 찾아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이렇게 열심히 들으면서 읽으니 공원 벤치에 앉아 있으면 옆에 이탈리아 소녀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탈리아 할아버지가 무엇이라고 혼잣말을 하시는지 등등을 이해하게 된다. 항상 이탈리아 소녀들이 까르르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누구네 집은 방이 몇 개고 샤워시설도 최신식이고 어쩌고" 하는 별 의미 없는 이야기로 까르르하면서 웃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어는 마라톤이다.
언어를 공부하다 보면 내가 들어보지 못한 말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다. 언어는 무궁무진하고 단어도 수많은 조합 속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에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는 추상명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6개월에 모든 것이 학습되는 언어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또한 언어는 시간을 지나며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멈춰있는 언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얼마나 많이 노출되고, 꾸준히 노출되었느냐에 따라 달린 문제이다.
아주 새로운 언어의 단어는 쉽게 암기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맥락 속에서 수십 번, 수백 번을 만나면 아무리 어려운 단어도 결국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단어라면 평생 그 단어를 모른다고 봐야 한다. 듣고 또 듣고, 또 들어봤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듣기 교재가 있는 책이다. 영서당 TV에서도 강조했듯이 언어 노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듣기 교재를 활용한 읽기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나 영화는 그 언어의 뉘앙스를 장면으로 보여주기에 책 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절대적인 노출량은 책이 월등하다는 것이다.
책만 읽어도 좋지만, 그 언어에 대해서 초보는 무조건 듣기 교재를 함께 활용해야 한다. 그 언어를 발화하는 특유의 억양이 각 언어마다 존재하기 때문에 많이 들으면서 익숙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모창이나 성대모사를 잘하는 개그맨들, 예를 들어 김영철 씨나 조혜련 씨가 언어를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빠르게 배우는 것도 그 소리를 잘 따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들은 당연히 그 소리를 잘 따라 하기 위해서 열심히 듣고 흉내 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 번의 흉내로 완성되는 것은 없다. 부단히 노출되고 듣고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