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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온 Feb 13. 2024

자코미누스

달과 철학을 사랑한 토끼

<레베카 도트르메르 지음, 이경혜 옮김, 다섯수레, 2022>


2021년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한 해였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상념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교사로서, 엄마로서 살아온 시간들! 그 동안 참 많이 바빴고 조급했다. 

돌이켜보면 조금 더 여유를 갖고 편안하게 살아도 좋았으련만, 나는 늘 분주하게 매일 매일 미션을 수행하듯 보냈던 것 같다.

적지 않은 나이, 오십!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가 꽤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제는 조금씩 지나온 발자취가 보이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볼 여유가 생겼다. 나의 시작과 끝, 존재의 의미, 내가 누린 시간들은 무엇이었을까.

<자코미누스-달과 철학을 사랑한 토끼>는 자신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하는 토끼, 자코미누스의 이야기이다. 가로 세로 30cm, 상당히 큰 판형의 이 책은 아름답고 몽환적인 초록색의 표지부터 매우 인상적이다. 귀를 쫑긋 세운 토끼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표지를 넘기면 등장인물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속표지가 보인다. 연이은 작가의 인사도 여타의 책들과 다른 지점에 있어서 무척 신선하다. 

본문을 펼치는 순간 “와...” 절로 탄성이 나온다. 따뜻하면서도 화려한 색감, 가을의 낙엽들과 그림자는 너무나 섬세하고 다채롭다. 등장하는 다양한 동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도 아주 쏠쏠하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거대하고 하얀 배경, 그 안에 홀로 있는 토끼!

글과 그림과의 조화, 극명하게 대비되는 색채와 크기, 독특한 화면 구성은 독자를 더욱 책 속에 몰입하게 만든다.


자코미누스가 굴러떨어진 곳이 바로 그 계단 위였어.

그날 이후, 자코미누스의 한쪽 다리는 다른 다리보다 좀 힘든 신세가 되었어.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없었어. 자코미누스는 절뚝거리며 걷게 되었지.

“다리 좀 절뚝이면 어때? 남들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베아트릭스 할머니는 손자를 달래주었어.


이토록 절묘한 표현과 긍정, 대범함이라니!

이 책의 저자 “레베카 도트르메르”는 <잊혀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공주 백과사전>,<레베카의 작은 극장>, <바바야가>,<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으로 주목받고 있는 프랑스 작가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매우 환상적이고 독특한 작가의 그림에도 감탄했지만, 그림 못지않게 탁월한 문장력과 삶에 대한 성찰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놀랍도록 섬세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평범한 우리 모두가 제각기 삶의 주인공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소박한 삶은 무엇보다도 가치있고 풍요롭다는 것을.

자코미누스가 날마다 조금씩 배운 것들, 함께 한 많은 이들, 기다린 많은 것들을 보며 한 컷 한 컷의 그림에 한참을 머물렀다. 내가 배운 것들, 나와 함께 한 이들, 내가 기다린 많은 것들은 무엇일까?

자코미누스는 노인이 되었고 보다 소중한 것들에게 마음을 쓰게 된다. 그에게 소중한 것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공원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기

베란다에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 기억하기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우던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떠올리기

모래밭에 찍힌 갈매기 발자국들이 파도에 젖어 드는 장면 바라보기...

(...)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소중한 것들에 나는 얼마나 마음을 쓰며 살았을까?

소중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심하게 지나쳐 버린 것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자코미누스는 문득 생각한다.


‘나는 세상의 주인공은 아니었지. 내 삶은 소박했어. 평범한 삶이었지만 용감하고 만족스러운 일생이었지. 자기 일을 잘 해낸 작고 좋은 삶이었어. 

나의 소박한 삶이여, 나는 너를 많이 사랑했단다. 너는 나를 밀어뜨려 다리를 절게 하고 힘든 시간을 주었지만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했어. 

그리고 나의 늙음이여, 너도 알고 있니? 너는 정말로 겪어 볼 가치가 있었다는 걸!’


자코미누스의 어린 시절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보며 내 삶도 자코미누스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생각했다. 때로는 어렵고 힘들었으며 때로는 행복했다. 자코미누스처럼 많은 것을 배우고 기다리며, 많은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 속에서 내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잊지 말고 더 많이 마음을 쓰며 살아야겠다.

그리하여 훗날, 풍요로웠던 내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나 역시 달과 철학을 사랑했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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