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습니다
유난히 햇살이 반짝거리는 날이 있습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카페에서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리고, 티를 채우고 있었어요. 비슷한 일의 반복, 컵을 씻고 닦고, 다시 따르고, 비워진 컵을 다시 씻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왠지 마음이 들떴습니다. 괜히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는 웃음이 나와 실실거렸고, 무례한 손님이 거칠게 내뱉은 말도 방패가 있는 듯이 다 나의 몸 밖으로 튕겨 나갔습니다. 그날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날따라 싱크대에 비친 햇살이 얼굴을 찡그릴 만큼 반짝이며 부서지고 있었다는 것. 마치 그 반짝거림이 나를 홀린 것 같았습니다. 햇살이 부리는 마법에 나는 그만 무방비한 상태로 빠져버리고 말았던 거죠.
그런 마법과 같은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점차 옅어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하늘은 점점 더 땅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늘이 눈치 없이 이글거리는 빨간 태양을 데리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그 틈을 채우는 건 바로 바람입니다. 가을의 하늘이 얼마나 높고 파란지, 살랑대는 바람은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맘때쯤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압니다. 가을이 왔다는 것을요. 평소와 달랐던 건 딱 그 반짝이는 햇살 하나였는데도, 당장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보면 정말 마법이란 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지금도 세상의 곳곳에서는 그런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니까요.
그렇게 햇살에 취해 붕 뜬 기분으로 커피를 만들다가 나도 모르게 카페의 유리창 밖을 쳐다보았습니다. 전에는 정말 몰랐었는데, 조금만 고개를 들자 도로 건너 맞은편에 서 있는 전봇대와 흔들리는 나뭇잎 뒤로 빨간 벽돌의 빌라 한 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왜 몰랐을까요. 그 낡은 빨간 벽돌을 보자마자 나는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무해하게 천진하던 시절, 어느새 햇살의 마법은 나를 그 눈부신 시절로 데려가 버렸습니다. 잊고 살던 소중한 시간 속으로요.
2000년대 초반에는 빨간 벽돌로 된 집이 참 많았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할 수 있는) 나의 처음 집도 빨간 벽돌이었습니다. 집 앞에는 뚝방길이 있었고 그 뒤로는 하천이 흘렀습니다. 그 동네는 높은 집이 하나도 없었기에 언제나 하늘과 닿아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대문에 매달려 하늘을 쳐다보면서 온갖 이야기를 속으로 지어내곤 했죠. 그 뚝방길과 나의 옛 빨간 벽돌집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친해졌는지 혹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함께했던 대부분의 기억은 사라졌어요. 그렇지만 그 시절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그 아이입니다. 형훈이. 8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이웃사촌이었어요. 내 동생과 형훈이의 동생을 포함해서 우리는 넷이었고 항상 함께 놀았습니다. 눈 뜨자마자 잠옷 차림으로 형훈이네 집으로 달려갈 만큼 다 같이 노는 게 좋았어요. 지금은 잘 지내는지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추억 속의 친구들이지만, 그런 순수한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그 얼굴들을 떠올릴 이유는 충분합니다. 지금 가까이에 있지 않아도,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도 단지 그 눈부신 시간을 함께 나눴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니까요.
가장 또렷한 기억 중 하나는 잠자리 잡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잠자리 날리기일지도 모르지만. 어렸을 때 나는 천식을 앓았습니다. 감기에만 걸리면 숨쉬기가 힘들어 잠 못 드는 날이 많았어요. 지금도 앉아서 꾸벅꾸벅 지새우던 밤과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생각납니다. 몸 안에 숨이 모자라서 그런지 그 시절의 나는 피부가 너무 하얘서 어딜 가나 하얗다는 소리를 줄곧 듣곤 했습니다. 반면에 형훈이는 나와 정반대였어요. 무척이나 튼튼하고 천하무적인 장난꾸러기였습니다. 매일같이 온갖 곳을 나다녀서 그런지 피부도 나와는 다르게 무척 까맸습니다.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던 우리들. 처음에는 걔네랑 노는 게 벅찼던 기억이 납니다. 매일 뚝방길을 날아다녔으니까요. 왜 그렇게 한시를 못 참고 뛰어다니는지, 기관지가 약해 달리기를 못했던 나는 쫓아가기가 버거워 매번 뒤처졌고, 주저앉아서 숨을 몰아쉬곤 했습니다. 그때는 나를 버리고 그 형제와 함께 멀어지는 동생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어려웠던 것도 잠시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정말 친해지게 된 후로는 (사실 친해진 게 먼저인지 걔네가 나를 배려해준 게 먼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냥 뛰어다니지도 않고, 뛰더라도 나를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도 늘어갔습니다. 어쩌면 나는 형훈이와 놀면서 나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나를 달리게 했고, 움직이게 했습니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살랑이는 마법을 부리는 계절, 가을이 다가오고 있을 때 즈음 형훈이는 잠자리 잡기에 빠져있었습니다. 기다란 잠자리채를 한 번 휘두르면 꼭 거짓말처럼 그 안에는 잠자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날도 역시나 잠자리채를 들고 나타난 형훈이는 잠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셋은 저마다 신이 나서 형훈이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어요. 나중에는 잠자리채도 귀찮았는지 어딘가에 버려두고서는 손으로만 계속 잡았습니다. 그렇게 잡고 환호하고 잡고 소리지르기를 반복하면서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자 채집통에는 어느새 잠자리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이제는 잡는 것보다 통 안에 넣는 것이 더 힘든 지경이 되었죠. 통 속의 잠자리들이 행여나 빠져나갈까 봐 꼼지락꼼지락 애쓰면서 잠자리를 구겨 넣는 걔를 보며 도대체 언제까지 저러려나 싶어 “그렇게 많이 잡아서 다 뭐 하게!” 하고 물었지만 형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잠자리를 잡아댔습니다.
그렇게 온 동네를 돌아 다시 형훈이네 집 마당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진맥진하게 조그마한 간이 철봉에 걸터앉으니 어느새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잠자리 한 마리가 순식간에 채집통의 틈 사이를 빠져나갔습니다. “쟤 탈출했다! 다시 잡아!” 우리는 빨리 다시 잡으라고 형훈이를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형훈이는 “우리 그냥 이거 풀어줄래?” 하더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집통의 문을 열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수십 마리의 잠자리들은 노을을 향해 일제히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깝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나는 곧바로 그 풍경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주황빛과 노랑 빛 하늘에 펼쳐진 수십 마리의 잠자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회색의 그림자들과 벽돌담 그리고 발 밑의 잔디까지 전부 다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그 장면은 살면서 봤던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어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머릿속에 저장된 그때의 풍경은 지금까지도 아련하지만 선명한 기억으로 가슴 어딘가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바라만 보았던 것 같아요. 그 노을 지는 하늘과 잠자리들을.
왜 갑자기 그걸 날려버리는 엉뚱한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충분히 형훈이다운 행동이었고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잠자리를 잡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티 없이 아름다운 장면을 선물해준 형훈이. 그 무해한 시절을 추억하는 지금의 나는 그때의 우리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생에서 그런 순수한 기억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과 그래서 얼마나 소중한 추억인지도요. 앞으로도 나는 그때의 어린 나로 돌아갈 수 없겠죠. 시간이 흘러 그 아이들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있으니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형훈이의 개구쟁이같이 해맑은 웃음소리와 늦여름의 선선한 바람을 두고두고 간직해야겠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던 때가 있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내가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요. 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 좋습니다. 그 시절의 한 장면 속에 나를 푹 담갔다가 건져내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때의 햇빛과 하늘과 마음이 내 몸에 적셔져 있겠지요. 나는 그렇게 젖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거워질수록 가벼워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제목은 정말 좋아하는 소설집인 최은영 작가님의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따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