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 미술관을 나오며
과거에 비해 미술계의 전문 종사자가 아니어도 미술을 향유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잃지 않고 약간의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아주 늦은 나이에도 본격적인 미술가의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전문가적인 혹은 아카데믹한 완성도를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대중들을 감동시키고 열광시킬 수 있는 관용적이고 여유로운 시대가 된 것이다. 미국의 그랜마 모제스는 이러한 사정을 여실히 입증한다.
그녀는 76세에 그림을 시작해서 100세에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모제스의 날’로
지정되면서 국민 화가의 반열에 올랐고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과 버터 만들기. 안나 메리 로버트슨 모제스
하지만 아직도 대중문화 시대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 대중들은 여전히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선상 위에 서있다. 몇몇 작가들은 그러한 대중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 각종 대중 매체의 융합 fusion을 넘어 혼란 confusion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의 대중성을 난해함으로 꼬아놓은 작가의
의도는 또 다른 배타적 영역을 위한 미필적 고의나 다름없다.
대중의 수용 여부나 평가와는 무관하게 평론가들과 언론인들, 미술관 종사자들 같은
진영 내의 관계망을 통해서 최고의 상품가치를 만들어내는 소위
‘그들만의 리그’라는 구별 짓기 놀이에 여념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팝과 네오팝이라는 레토릭과 대중매체를 들고 나온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마우리치오 카텔란, 데미안 허스트 등은 일체의 권위주의에 대한 조롱과 청산,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폐해에 대한 비판, 존재하는 것들의 무상함을 드러내기 등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듯 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벌룬 도그 인 루브르. 제프 쿤스. 네오 팝
제프 쿤스는 값싸고 질 낮고 저속한 이라는 뜻의 ‘키치’를 모나리자와 동격화 시킨다. 흔하고 유치한
대중 상품을 예술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함으로써 대중을 지배해오던
권위의 전복과 대중문화의 지위 상승을 동시에 재고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 데미안 허스트. YBA 그룹
제작비 190억 원 판매가 950억 원. 데미안 허스트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극복하고 축하하자는
의미에서 실제 해골을 웃는 모습으로 만들고 백금으로 주조한 후,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1800여 개의 각종 보석을 장식했다.
아메리카. 마우리치오 카텔란. 황금 변기
이탈리아 출신의 조각가이자 행위예술가인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약 70억 원 상당의 18k 황금으로
변기를 만들어 구겐하임 미술관의 화장실에 설치해두고 일반 관람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전시했다.
데미안 허스트는 위 작품을 보고 카텔란의 황금 변기는 세계 부자들의 부정축재 행위를 비롯한
21세기 미친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평한 바 있다.
이와 같은 흐름은 미술계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과 전복이라는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불러온 마르셀 뒤샹의 <샘>에의 복제와 답습을 이어오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동시에, 때때로 그들의 작품이 보여주는 문명과 인간의 이기와 계급적 속물근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적 측면은 그런대로 사줄만한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이 양산해내는 그 모든 작품들과 행위들이 자본주의의 대중문화 산업 - 예술이 아닌 산업이다! -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과연
수백수천억 원이 매겨질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는 없다.
아카데미즘을 무너뜨린 모더니스트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그들은 정작,
자신들의 작품이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 있지 않고 루브르, 사치, 테이트 브리튼,
구겐하임을 들락날락거리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유명한 거리 미술가 뱅크시의 발언은 바로 이러한 현대 미술이 처한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나는 갤러리가 돌아가는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늘날 예술작품의 가치는 백만장자가 그것을 좋아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미술이 철학, 음악, 의학, 기술, 스포츠라고 불릴 수 없고 반드시 <미술>이라
불려야만 하는 것은 <미술>이 아닌 분야의 것들과는 다른 조건, 다른 도구와
표현방법을 이용하는 제작과정을 통해 그 결과물이 만들어지며,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과 그 작품들이 감상되고 평가를 받는 소통 과정을 <미술>이라는 용어로 명명하자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페르낭 드 소쉬르에 따르면, <미술 도구로 제작한 평면, 비평면, 입체의 어떤 것으로서의 미술>이라는 기의와 <미술>이라 불리는 용어로 명명하자는 기표의 결합이 우연적이거나 논리적 귀결이 아닐 수 있더라도, 다시 말해서, 주술, 기술, 미술로 불려도 그 본질적인 의미는 변함없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본질과 판단 그리고 의미의 생성은
약속된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시간상의 차이를 두고 태어난 이러한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용어가 때로는
그 의미를 벗어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적 약속과 용어의
잘못됨이 아닌 것이다. <이성>이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의 조율로서 의미를 나타내는
기표로서가 아니라 억압과 또 다른 지배라는 기의로 작동해서 비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전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성>의 본질적인 의미가 희석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며
관점의 문제와 실천적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미술은 인간이 만들었고 만들어나가고 있는 문명의 수단과 도구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세상에는 이러한 수단과 도구를 이용해서 개인적인 혹은 시대적인 문제와 답을
표현해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미술에 대한 여러 가지 담론을 형성해오고 있는
미술사를 구성하거나 평론계나 미술시장을 지배해온 <미술>은 광의의 의미 즉,
아동미술, 학교에서 행해지는 교육 미술 혹은 일반 대중들이 향유하는 취미로서의
미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와 같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미술>들 또한 시대의 경계와 틀을 부수고 세우는데 커다란
밑바탕을 역할을 해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술>에 관한 공론적인 이야기는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전시된 작품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에 다시금 공명한다. 인간의 역사에 수많은 유명, 무명의 미술가들과 그들만의 개성과 독창성을 지닌 더 많은 작품들이 존재했었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술>이라는 짧은 언어로 규정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추상적이다. 인간의 감각으로 알 수 없다.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다만 누군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운명처럼 만난 어떤 이를 보고 가슴이 쿵쾅 뛰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이슥토록 보고도 헤어지기 싫고,
두 손 마주 잡고 생애 끝까지 함께 하고 싶고, 안고 또 안고 싶어 애달파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다만 수만 년 전 동굴 벽면에 그림을 그렸던 구석기시대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다만 최초의 자화상을 그린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
알프레드 뒤러가, 다만 그림이 더 이상 사물을 똑같이 복사하는 역할에서 떠나 직관적으로 보이는 인상을 포착하고자 한 모네가, 보여 지는 미술에서 생각하는 미술로의
전환을 주창한 마르셀 뒤샹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인간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 수만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미술가가 있어왔고 있을 뿐이다.
그 셀 수 없이 수많은 미술가가 셀 수 없이 수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같은 유형의 작품들도 미술가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환된 르네상스 시대라 해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의 작품을 구별하지 못하는가?
그들이 다 15세기 무렵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했고, 그리스 고전적
사실주의 미술작품을 부활시키고, 평면의 캔버스 위에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원근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라파엘로의 모나리자가
같은 작품일 수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사랑법이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본질을 찾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묻고 답을 찾아 헤맨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역시 간명하게 답하기 어렵다.
수많은 미술가의 수많은 작품이 있다. 양식(style)이라 불리는 시대를 대표하는
비슷한 유형의 작품과 대표 미술가들이 있다. 주류에 속하지 못한 미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녹아들어 간 작품은 또 얼마나 많이 사라져 버렸을까? 무한하게 생성하며 존재하는 세계에 비해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불완전하다. 유한하기 때문이다. 해서 궁극적인 것, 근원에 관한 것,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원리, 본질을 추구한다. 미술가가 미술인가?
미술가는 누구인가? 미술가는 미술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미술작품이
미술인가? 미술가도 미술작품도 미술은 아니다. 그래서
‘사실상 미술은 존재하지 않을까?’ 아니다. 너무 많은 미술가와 너무 많은 유형의
작품들로 인해서, 한 마디 한 문장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고 해서, 결국 인간의 지각적 인식의 한계로 인해서 미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의 어떤 것, 사랑은 느낄 수 없는 비 지각적인
어떤 것이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분명 존재하듯이 미술 또한 미술가, 미술작품, 감상자들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아니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관계가 미술이다.
그 관계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지거나 느낄 수 없을 뿐이다.
<미술>은 사랑처럼 추상적인 용어로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술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런가? 인간이 미술과 같은 예술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인류로서 지금까지
생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변화된 세상을 이룰 수 없었다. 미술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며 그 자체로 끊임없이 생성하는 완성체인 세계와의 관계 맺음에 대한
본질을 묻고 찾는 행위들 중 하나이다.
해서 과거에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묻고 또 묻는 것이다. 과연
미술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