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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Sep 22. 2022

선생님 우리 선생님

  나도 얼른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이 되면 함께 놀던 동네 친구들은 모두 어딘가를 가고 동네가 조용했다. 친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하루 종일 동생과 둘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림도 그리고 텔레비전도 보고 소꿉놀이도 하고 짜개 놀이도 하다가 언니가 내주고 간 숙제를 했다.

  나보다 5살 많은 언니는 웬만한 엄마들만큼이나 학구열이 대단했다. 엄마도 가르치지 않는 한글 공부를 언니가 시켰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늘 그리고 색칠하던 내가 글자 쓰기에 매진하게 된 것도 언니 때문이었다. 한글 공부를 시작한 정확한 계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옆집 언니와 동생이 주산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노란 학원 가방을 들고 우리 집에 와서는 내 앞에서 글자도 쓰고 주판에 수도 놓으며 자랑을 했다. 그게 아직도 생각나는 걸 보면 어지간히 부러웠던 건지 아니면 아니꼬왔던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 언니도 동생이 똑똑하길 바랬을지도 모른다.

  언니가 8칸짜리 공책을 펼쳤다. 첫 줄에 단어들을 써주면 한 페이지를 다 채워서 따라 쓰는 게 숙제였다. 언니와 어디서부터 공부를 한 건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내 기억 속에 펼쳐져 있는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대한민국 만세, 천하장사 이만기, 김일성, 공산당, 김완선

 



  어쨌거나 우리 언니 덕분인 건지 나는 유치원을 다니는 옆집 아이보다 한글을 빨리 뗐다. 준비가 되었으니 하루빨리 학교에 가서 뽐내고 싶었다.

  내가 학교에 가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는 옆집 언니 때문이었다. 제법 친하게 지냈지만 그 언니가 나는 별로 좋지 않았다. 집 자랑, 아빠 차 자랑, 미미 자랑, 레고 자랑, 침대 자랑, 언니 집 우물에 있는 작두펌프 자랑, 자랑 자랑 자랑. 그게 늘 불만이던 차에 언니가 입학을 하면서 우리 언니와 함께 등교를 하는 것에 질투가 났다. 우리 언니는 가끔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갔는데 뒷자리에 꼭 붙어 앉아서 다정하게 가는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다. 자기 동생인 나보다 그 언니를 더 챙기는 것 같아 언니에게도 심술이 난 건 마찬가지였다. 나도 얼른 입학을 해서 언니랑 같이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 우리들은 1학년 어서어서 배우자

  | 구경하는 참새들아 같이 배우자


  꿈에 그리던 국민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언니와 단둘이 등교할 줄 알고 설렜던 마음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 언니도 여전히 국민학생이었고 같이 다니는 우리 언니의 친구들도 더 있었다. 더군다나 6학년이던 우리 언니에게는 내가 어지간히 귀찮았던 게 아니었다.

  언니들의 걸음에 맞춰 걷느라 종종걸음을 걷다가 반도 가지 못해 이내 다리가 아프다며 징징거렸고 결국 언니에게 업혀서 갔다. 언니가 힘들어해서 그런 건지 가끔 언니 친구들도 나를 업어줬다. 언니 친구들은 나를 엄청 귀여워하는데 대체 우리 언니는 왜 나에게 짜증을 내는지 모르겠다. 잔뜩 짜증이 난 언니에게 혼이 나서 서러운 맘에 아침마다 눈물바람을 하긴 했지만 언니 등에 업히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 아마 다리가 아프다는 것도 걷기 싫어 꾀를 부린 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저학년들은 오전반/오후반으로 나뉘어 일주일씩 교대로 등교를 했기 때문이다. 너무 어릴 때라 그때 학생수가 얼만큼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지금은 한 반에 20명도 안된다고 하니,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였지 않을까.

  그나마 오전반일 때는 언니와 함께 등교를 할 수 있었기에 괜찮았는데 오후반이 되어 혼자 걷는 그 길은 더 멀게 느껴졌다. 처음 몇 번은 엄마가 데려다주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8살 아이에게는 힘든 여정이었다.

  혼자 다녀야 하는 게 한몫했던 건지 오후반을 시작하면서 학교가 가기 싫어졌다. 학교에 대한 환상이 너무 일찍 깨져버린 것이다. 막상 가고 보니 별 재미가 없었다. 학교는 시시하다고 생각했고 점점 흥미를 잃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친한 친구도 없었고 선생님도 낯설었다.

  오전반 때는 엄마에게 혼이 날까 봐 멀쩡하게 집을 나와서는 학교가 보이기 시작하면 전봇대에 매달려 안 가겠다고 울며 버텼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를 어르고 달래서 등교를 시켜야 하는 건 오롯이 언니 몫이었다(가끔 그때 얘기가 나오면 언니는 진저리를 쳤다).

  오후반 때는 일부러 지각을 했다. 혼자 밖에서 놀다가 겨우겨우 억지로 들어갔다.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그날은 내가 좋아하는 노랑 연두색 반바지를 입고 자잘한 레이스가 달린 하얀 반양말을 신고 집을 나섰다. 학교가 가기 싫어 울고불고 엄마랑 실랑이를 하다가 엄마가 큰 맘먹고 입혀준 아끼던 옷이었다.

  학교에 가려면 다리를 하나 건너야 했는데 그날따라 다리 아래로 반짝이는 시냇물이 졸졸졸 하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냉큼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큰 돌멩이 위에 앉아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그고 신선놀음을 했다. 내 발가락 가까이에서 꼬리 치는 겁 없는 송사리 떼를 잡겠다고 물속에서 허리를 굽힌 채 진을 쳤다. 대부분 허탕을 쳤지만 학교에 가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기는 가야겠는지 주섬주섬 벗어놓은 양말과 신발을 신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터덜터덜 겨우 학교 앞에 도착했지만 들어가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실내화 주머니를 질질 끌며 언니를 찾아갔다.

  그때 언니는 1학년 1반 바로 앞에 있는 유치원 교실 청소담당이었다. 친구들과 청소를 하다가 나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 오는 거냐고, 옷은 왜 다 젖은 거며 늦었으면 교실로 바로 갈 일이지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다그쳤다.

  사실 나도 양심이 있지 교실 앞까지는 갔었다. 그런데 교실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은 보이지 않고 수업 중인 것 같은데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선생님께 혼이 날까 봐 조금 무섭기도 했다. 하천에서 놀 때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더니 그때만큼은 콩알만 해졌다.

  언니는 눈을 어디까지 찢고는 나를 매섭게 째려보며 거칠게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교실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교실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나오셨다.

  그날이다. 내가 우리 선생님의 얼굴을 제대로 본 날이. 우리 선생님의 성함을 머리에 새긴 날이.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 이유는 바로 우리 선생님 때문이다.




  교실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나오셨다.

  "선생님, 선미 언닌데요. 선미가 이제 와서요. 못 들어가고 있어서 데려다주려고요"

  언니가 말하는 동안에도 나는 무서워 고개를 푹 숙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와 눈을 맞추려 자세를 낮추시고는 나의 어깨를 감싸셨다.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한 파마머리에 인자한 웃음을 지니신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는 무서움이 조금 사라졌다.

  "잘 왔어. 선미야, 선생님이랑 들어가자"

  다리 밑에서 대체 얼마나 놀고 왔던 건지 수업은 벌써 2교시가 시작되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자리에 앉히시고는 왜 이렇게 늦은 건지 물어보셨다.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께서 나를 추궁하거나 혼내려는 의도가 아니란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여리게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오늘 등굣길에 보았던 것들에 대해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발만 담그려고 양말을 벗었는데, 물속에 예쁜 돌이 있어서 돌을 줍다가, 송사리를 보고 송사리를 잡으려다가, 옷만 버리고 결국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주웠던 예쁜 돌마저 깜빡하고 놓고 왔다는 나의 앞뒤 없는 얘기가 흥미로운 듯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셨다. 선생님의 눈이 아까 보았던 흐르는 냇물만큼이나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나의 한마디 한마디에 호응을 해주시며 끝까지 다 들어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혹시나 내일 또 가고 싶어 진다면 송사리는 잡지 말고 물밖에 있는 돌중에 가장 예쁜 돌멩이 하나를 주워서 선생님께 보여달라고, 그럴 수 있겠느냐고.

  나는 선생님이 나처럼 돌멩이를 좋아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늘은 송사리는 잡지 않을 거라 양말은 벗지 않았다. 흐르는 물가를 따라 걸으며 나름대로는 심사숙고하여 내 맘에 꽉 차는 돌을 주웠다. 호주머니에 잘 넣어두고 신나게 박자 맞춰 투스텝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당연히 또 지각이었다. 또 언니를 찾아갔고 나 대신 언니가 또 교실문을 두드렸다.

  "우리 선미 왔네!"

  선생님은 나를 꼭 안으시며 반겨주셨다. 옷도 하나도 젖지 않고 약속을 잘 지켰다며 칭찬해주셨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내 선생님 앞에 내밀었다. 예상대로 선생님 맘에도 꼭 드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보다 선생님이 돌멩이를 더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날부터 오후반을 할 때면 항상 다리 밑을 지났다. 아예 대놓고 당당하게 지각을 했다. 어떤 날은 풀꽃도 꺾어다 드리고 나뭇잎도 주워서 드렸지만 뭐니 뭐니 해도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돌멩이를 제일 많이 주워 갔다.

  선생님은 등교하는 나를 보고 항상 밝은 얼굴로 꼭 안아주셨다. 그럴 때면 선생님께 돌멩이를 드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은은한 화장품 냄새가 너무 좋아서 계속 안고 싶었지만 선생님께서 나를 안아주실 뿐 나는 부끄러워서인지 팔을 뻗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바람이 부는 날이면 또래보다 작고 많이 약했던 내가 바람에 날아갈까 봐 걱정이라며 주머니에 예쁜 돌멩이를 하나씩 꼭 넣어주셨다. 우리 선미 멀리 날아가지 말고 조심해서 가라는 당부와 함께.

  따뜻한 우리 선생님이 나는 좋았다. 항상 칭찬받고 싶었고 잘 보이고 싶었다. 아마도 그런 마음이 너무 커져버린 탓에 그 일이 일어난 것 같다.


  받아쓰기 시간이었다. 사실 받아쓰기는 언제나 자신 있었다. 우리 반에서 나보다 글자를 잘 아는 친구는 별로 없었기에 선생님께 잘 보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1번 개미가 물에 빠졌습니다

2번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3번 개미가 소리쳤습니다

4번 비둘기가 나뭇잎을 떨어뜨렸습니다...........


  오늘도 백점 맞아서 칭찬받아야지.


7번 개미가 위험을 무릅쓰고...... 무릎쓰고...... 무릅쓰고...... 무릎쓰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한쪽 팔로 시험지를 가리고 팔 위에 머리를 박은채 계속 생각했다. 그러느라 뒤에 문제는 듣지도 못했고 얼굴도 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자신 있는 받아쓰기를 망쳐버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마도 이걸 본다면 선생님은 나에게 실망을 하시겠지. 그렇게 만들 수 없었다. 얼른 시험지를 구겨서 책상 서랍 안에 뭉쳐 넣고는 모르는 척 엎드려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 채점한 시험지를 나눠주시며 내 이름이 없더라고 하셨다. 분명 냈다며 시치미를 뗐고 그날은 별일 아닌 듯 지나갔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는 버릇이 되어 버렸다. 모르는 문제가 나오거나 만족하지 못할 만한 결과라면 시험지를 구겨서 책상 서랍 안에 쑤셔 넣기를 여러 번,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내 짝의 고자질로 결국 선생님께 들키고 말았다.

  그래도 나를 좋아하시니까 혼은 나지 않을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나를 안아주시면서 괜찮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그동안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시고는 크게 혼을 내셨다. 뭐라고 혼이 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나의 거짓말이 선생님을 화나게 했으리라.

  선생님께 더 잘 보이려고 그랬던 건데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선생님이 야속해서 엉엉 울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예뻐하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엉엉엉 울었다.


  내 걱정과 다르게 선생님은 따뜻한 우리 선생님으로 금방 돌아오셨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나를 안아주시고 쓰다듬어 주셨다. 그럴수록 나의 행동이 생각나 부끄럽고 죄송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께 넘치도록 과분한 사랑을 듬뿍 받고 나는 쑥쑥 자랐다. 이제 지각도 하지 않았고 틀리면 틀리는 대로 더 이상 시험지를 숨기지도 않았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방학식을 하던 날, 우리 선생님께서 전근을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운동장에 선채로 일정이 끝날 때까지 울고만 있었다. 그런 나를 보신 선생님께서는 꼭 안아주시며 건강하고 멋지게 잘 크라고 하셨다. 그게 마지막 포옹이었다.

  그렇게 선생님과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올해 초 등굣길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랜만에 언니 등에 업혀서 꺼이꺼이 곡을 하며 왔다. 1년 사이 내가 많이 커서 무거워진 건지 언니는 우는 나를 업었다가, 내렸다가, 쉬었다가, 친구에게 맡겼다가, 질질 끌었다가, 다시 업어가면서 무사히 집까지 데려왔다. 언니도 우리 선생님이 정말 좋은 분이셨다고 말하며 내 울음에 공감이라도 하는 듯 웬일로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나고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났다.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된다면 선생님을 꼭 찾아뵈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시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더라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해두기 위해 일기장에 또박또박 글자를 새겼다.


| 화랑 국민학교 1학년 2반. 우리 박경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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