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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Sep 07. 2022

여름을 닮은 아이

고등학교 때 동아리 활동으로 학교 신문반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나는 작가로, 그 애는 기자로 우린 그렇게 만났다.

신문반은 한 학년에 5명씩이었는데 그때 1학년은 나를 포함해 4명이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불편하거나 어색할 게 없이 화기애애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애만 빼고.


그 아이는 창백하리만큼 뽀얀 얼굴에 붉은색이 도는 갈색 뿔테 안경을 쓰고 다녔다. 턱선으로 이어지는 밝은 갈색의 단발머리는 찰랑찰랑 윤이 났다. 통통한 얼굴의 그 애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았다. 살짝 움켜쥔 뽀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늘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면 도톰한 눈두덩이가 내려오며 예쁜 반달눈이 되었다.

학교 신문은 한 달에 한부씩 발행했다. 선생님들의 개입 없이 기획부터 편집, 인쇄까지 모두 우리 손으로 만드는 거라 생각보다 할게 많았다. 그래서 자주 모여 회의를 해야 했는데 4명은 잘 아는 사이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얘기도 잘하게 되고 선배 언니들과도 금방 가까워졌지만 그 아이만은 그러지 못했다. 늘 창백한 얼굴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회의가 있을 때 종종 참석을 못하는 일이 많아졌고 혹시나 그 애가 소외감을 느끼는 건 아닐까 나는 신경이 쓰였다. 그러던 어느 날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슬쩍 물어보았다.

몸이 좀 아파서 병원에 가느라 결석을 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많이 아프냐는 말에 그냥 마음이 좀 아프다고 말하는 그 애는 다행스럽게도 표정과 목소리가 밝았다.

워낙에 얼굴에 핏기가 없기도 하고, 뛰는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기도 해서 혹시 심장이 안 좋은 건 아닐까 혼자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뒤로는 그래도 함께 있을 때 말도 몇 마디씩 하고 평소보다 더 크게 웃는 모습도 보였다. 당연히 괜찮은가 보다 싶었다.




그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걸어서 등교하는 길은 더웠고 연둣빛의 나뭇잎들이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거리던 기억만 난다. 아마도 6월 초 어느 날이었을 것 같다.

첫 교시 수업종이 울렸는데 신문반의 다른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그 아이가, 뽀얀 얼굴로 생글거리던 그 아이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이라고 했다. 그것도 스스로 그 무서운 길을 택했다고.

손이 덜덜 떨리고 엄청 울었던 기억뿐 수업을 들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음날인가 다함께 조문을 갔을 때 만난 친구의 엄마는 그동안 우울증으로 힘들어했었다고 하셨다. 그전에도 몇 번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엄마는 마치 모든 걸 예감이라도 한 듯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심장병이 아니라 우울병이었다....

그 아이가 아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그 사실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되어 무겁게 다가왔다. 아무도 나에게 탓을 하거나 뭐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아프다는 그 말을 듣고도 그냥 넘겨버린 무심한 내가 실망스러웠다. 혹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상대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 봐주었더라면, 아팠던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어루만져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두고두고 마음에 후회와 미련이 남았다.

그날 이후로 그 친구는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사람 같았다. 우리가 함께 만들던 학교신문에서도 그 아이의 이름은 지워졌고 몇 번의 소풍 사진에서도, 졸업앨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 기억 속에서나마 아직도 열일곱의 단발머리 소녀로 머물러있을 뿐이었다.


나는 어느덧 세 아이를 키우며 그때와는 다른 사람인 듯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 친구는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이 계절의 어느 날에 어느 곳에서는 그 애를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모이게 될까. 그곳이 어디일지는 몰라도 나의 마음도 띄워 보내 본다.


지금처럼 초록이 피어나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네가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여름은 네가 떠난 계절인데 나에게 너는 그냥 여름인 것만 같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 우리가 함께 한 짧은 기억이 점점 흐릿해져 가는데도 여전히 너의 미소는 신기하리만큼 선명하다고, 그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고. 용서를 바란다고.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사실은 나도 많이 무서웠다고.

대답은 듣지 못하겠지만 이제라도 말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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