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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Sep 07. 2022

삼킨 미역국

나만 엄마가 없다


  서럽다. 내 옆에 엄마가 없다는 것이 또 서럽게 올라왔다.

  이제 몇 년만 더 있으면 내 인생의 반은 엄마 없이 지낸 게 되는 건데도 아직도 그렇게 서럽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 것이 "엄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 더 서럽다. 나만 엄마가 없다.

  엄마가 옆에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조용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을 쥐고 흔들어댔다.

  순간순간 무의식 중에 떠오르는 기억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엄마에게 했던 못난 말과 행동이 미치게 후회되어 나를 아프게 찔렀다. 내내 잘 참아내는 것 같다가도 가끔은 너무 보고 싶어서 철없는 아이처럼 엄마를 찾는다. 친구들처럼 엄마와 통화하고 싶었고, 엄마와 사진 찍고 싶었고, 엄마랑 쇼핑 다니고 싶었다.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이 가고 싶었고, 엄마에게 잔소리 들으며 혼나고 싶었으며, 엄마 품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싶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귀한 내 아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이 너무나 먹고 싶었다.


  둘째 딸을 낳고 조리원에 있을 때였다.

  밖에 휴게실에서는 다른 산모들의 지인들이 늘 북적였다. 보통 친정엄마인 듯했다. 과일이며 간식거리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오셔서는 몸 푼 지 얼마 되지 않은 딸 걱정에 양말 신어라, 찬 거 먹지 말아라, 다리 펴고 앉아라 하며 엄마표 잔소리를 연신 늘어놓으셨다. 가끔 정수기에 물 받으러 나갈 때면 하나 맛보라고 권하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괜찮다고 거절하고 웃으며 방으로 쏙 들어왔다.

  물론 우리 어머님도 자주자주 보러 와주시고 간식도 넣어주시고, 돌아가실 때엔 여느 엄마들처럼 꼭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고 가셨다. 그럼에도 유독 그때는 왜 그리 마음이 허했었는지......

 내가 그렇게 원하고 기다리던 아기를 드디어 만났을 때,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과분하리만큼 큰 축하를 받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음에도 내 마음이 그리도 허하고 아렸던 것은 아마 나에게 엄마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 순간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면 누구보다 기쁘게 웃었을 엄마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조리원에서 나오는 음식은 맛이 좋았다. 특별히 음식을 가리는 편도 아니지만 누가 차려주는 밥상이라 그런지, 수유하고 늘 허기져서 그런 건지, 내 입맛에 꼭 맞아서 식사시간이 늘 기다려질 정도였다. 퇴소할 날이 다가올수록 음식이 제일 아쉬웠다.

  아기와 집으로 돌아가는 날, 어머님께서 미역국과 밑반찬을 가득해서 냉장고에 채워주시고 가셨다. 며칠 뒤에 다시 국이랑 반찬 해서 오시겠다고 그때까지 잘 먹고 있어라고 하시면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에 오자마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배가 고파도 밥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모유수유 중이었기에 자주자주 먹어야 했었는데 입맛이 없으니 먹고 싶은 음식도 없었다. 그래도 수유는 해야겠기에 양이 줄어들까 봐 물과 모유촉진차, 두유만 주구장창 마셔댔다.

  3일이 지났을 즈음인가, 어머님께 연락이 왔다. 미역국 다 먹었냐고, 지금 국 새로 끓여서 가져가는데 급히 가실 데가 있어서 집까지 넣어주지 못할 거 같은데 나올 수 있겠냐고. 국이 아직 냉장고에 남아 있다고 말씀드렸지만(차마 그대로 남았다고는 하지 못했다) 그건 남편 주고 새로 끓인 국 먹어라 하시며 들고 오신다고 했다. 아기 자는 동안 얼른 내려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에 대충 준비하고 카트를 끌고 내려갔다.

  어머님이 들고 오신 국 냄비는 생각보다 너무 크고 무거웠다. 다음 주까지 바빠서 국을 못 끓여 올지도 모른다고 미리 많이 끓여오셨다고 했다. 나는 "바쁘시면 안 해주셔도 되는데"라고 말하며, 임신 6개월 때부터 늘 하고 있던 손목 보호대를 꽉 쪼아 매었다. 카트는 기울여야 바퀴를 쓸 수 있었는데 기울이면 국이 쏟아질 정도여서 사실 바퀴는 있으나 마나였다. 그 크고 무거운 국냄비를 카트에 넣어 질질 끌다시피 들고 와서 한참만에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허리가 결리고 땀이 났다. 나는 다시 한번 손목 보호대를 쪼았다.

  엘리베이터는 마침내 7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카트를 살짝 밀어 나가려는데 바퀴가 홈에 걸려 뒤뚱하더니 냄비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순간 손목에 짜릿한 통증이 오는 바람에 바로 잡을 새도 없이 냄비는 엎어지고 말았다. 국이 얼마나 많았던지 엘리베이터 안에 찰랑하게 꽉 찼다. 산모용 미역과 소고기가 가득 들어 간 노란빛을 띠는 탁한 국물색만 봐도 진국일 듯싶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고 문에 비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수면양말을 신고 손목 보호대를 하고 옷을 몇 겹 걸친 내가 얼어붙어 서있었다. 3월 중순 무렵이었겠지만 엘리베이터 안은 아직도 찬기운이 가득했다. 출산한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었다.


  번뜩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 다행히 아직 엘리베이터는 7층에 멈춰있었다. 이걸 어떻게 치울까 잠시 생각했다. 고무장갑이랑 닦을 만한 게 필요했다. 내가 집에 가지러 간 사이에 누가 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누가 옆에 있다면 엘리베이터를 잡아두기라도 할 텐데... 일단 국냄비와 카트를 밖에 두고 얼른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무장갑과 비닐봉지와 키친타월, 휴지, 걸레... 손에 잡히는 대로 쓸어 담았다. 그 사이 아무도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현관 앞에 나와보니 엘리베이터는 지하 2층에 있었다. 망했다! 얼른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빈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

  다시 누군가 타기 전에 나는 얼른 이 처참한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나는 재빨리 고무장갑을 끼고 건더기부터 건져서 봉지 안에 집어넣었다. 휴지와 키친타월을 있는 대로 꺼내서 국물을 흡입시켰다. 고소하고 기름진 소고기 미역국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에 꽉 찼다. 그때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손이 더 바빠졌다. 올라가는 건지 내려가는 건지..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만 더.. 제발...

  마침내 문이 열리고 깜짝 놀라는 짧은 감탄사에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방금 청소 끝냈는데 미역국이 쏟아져 있고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도망간 줄 아셨단다. 그래서 화가 너무 났었다고. 지하에 가서 밀대 걸레를 챙겨 오시는 길이라고 했다.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다 닦을게요..."

  눈은 바닥에 두고 손은 국물을 쓱쓱 훔쳐내면서 나오지도 않는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계속 사과를 드렸다.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아주머니께서는 이제는 밀대 걸레로 닦으면 될 거 같다 하시며 그냥 안 가고 이렇게 닦아줘서 오히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셨다.

  내 손목에 손목 보호대를 보시고는 "아기 낳은 지 얼마 안 됐나 보네. 축하해요! 아기 잘 키워요. 그나저나 아까워서 어쩌나.... 맛있겠구먼.. 얼른 들어가서 아기 봐요. 이제 뒷정리는 내가 할게" 하셨다. 감사하다는 말과 죄송하다는 말이 뒤엉켜 서로 먼저 나오려고 싸우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몇 번의 인사를 뱉었는지 모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난 뒤에야 집에 혼자 두고 온 아이가 생각났다. 놀라서 뛰어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얼른 손 씻고 뛰어 들어가 아이의 입에 젖을 밀어 넣으며 또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아이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쪽쪽 거리며 젖을 빨았지만 이제는 내 차례였다. 왠지 모를 서러움에 부끄러움도 한몫했을까. 눈물이 바가지채로 터져 나왔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다시 배고픔을 느끼게 된 것이.

  잠든 아이를 눕혀 놓고 뒷정리를 하려고 조용히 나왔다. 봉지 안에서 새어 나오는 맛있는 미역국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갑자기 밥이 당겼다. 나는 정리를 하다 말고 냉장고 안에 있던 미역국을 한 국자 퍼서 대충 전자레인지에 데워 밥을 말았다. 그동안 먹지 않았던 만큼 다 채울 작정이었는지 금세 한 그릇 비워내고 두 그릇째 담아 자리에 앉았는데 눈치도 없는 눈물이 뜬금없이 2차전을 시작하였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를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밥 먹다 말고 혼자 꺼이꺼이 서럽게도 울었다. 그날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 한 그릇이 먹고 싶었을 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어리고 여렸던 지난 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엄마의 기억은 어느샌가 나에게 작은 트라우마로 남았고 엄마의 컨디션이 좋았을 때 조차 언제 다시 아프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온전히 누리지 못해 늘 불안했다. 그래서 엄마가 옆에 있어도 마음껏 써보지 못하고 늘 아꼈다. 소중한 물건을 아껴 쓰면 더 오래 쓸 수 있는 것처럼 엄마도 그런 줄 알았다.

  엄마가 그렇게 아팠어도 내 곁을 떠날 거라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기에 내가 가진 어떤 것보다도 소중히 다뤘다.

  마지막이 정해져 있는 줄 미리 알았더라면 사진이라도 더 찍고 냄새 한 번 더 맡고 하루 온종일 엄마 옆에 누워 얘기해봤을 텐데... 아주 작은 거라도 기록하고 기억해뒀을 텐데... 엄마의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뒀을 텐데... 우리 엄마의 음식에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음력 1월 17일. 어제 엄마의 제사상에 올릴 삼색나물을 무치면서 생각했다.

  살아생전엔 내가 어려서 해드리지도 못한 음식을 이제 와서 이렇게 엄마 제사상에라도 올려본다고.

  서러운 마음일랑 말고 그리운 이 마음만 부디 엄마에게 가 닿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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