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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Sep 07. 2022

잊혀질, 잊혀지고 말

대낮엔 괜찮은데 날이 저물어 어둑해지면 아빠는 헛것을 보았다.

아빠 발 밑에 벌레와 뱀 등이 바글바글 하다고, 손으로 아무리 내쫓아도 끝내 그것들이 다리로 기어 올라오고야만다며 아빠는 징글징글하다는 듯 손으로 다리를 털어내며 말했다.

밤에 잠을 푹 자야 다음날 컨디션이 그나마 괜찮아질 텐데 아빠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우느라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에 훤하게 불을 밝히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시켜주었지만 불이 다시 꺼지면 어김없이 아빠 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바글바글 한데 왜 자꾸 아무것도 없다고 거짓말하느냐고, 왜 나를 이런 곳에 재우려고 하냐고 오히려 화를 냈다.

답답함과 안쓰러운 맘에 눈물이 났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불을 켜고 집 밖으로 이불을 털어내며 그것들도 다 떨어져 나갔다고 안심시켜주는 것밖에는.

내 눈엔 보이지도 않는 거짓을 잠재우려 거짓말을 했다. 반복되는 날이 늘어갈수록 크게 지쳐갔다. 무서웠다.








아빠는 당신의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고서 그렇게도 가기 싫다던 요양원을 아무 말도 없이 들어갔다고 했다. 내 눈으로 보지 못한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올랐다.

우리의 기억을 잃어가며 이대로 점점 멀어져버리는 건 아닐까.

정말 우리 아빠도 누군가의 아빠로 살았던 그 긴 시간들을 다 잊어버리고 마는 걸까.


그런 마음과는 또 다르게 아빠가 요양원에 입소하자마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아빠의 전화에 심장을 내려 앉히지 않아도 된다. 혼자 있을 아빠 걱정에 밤잠 설치지 않아도 된다. 가까이 살면서 아빠를 더 들여다보지 못함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아픈 아빠를 원망하는 못난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아빠로 인해 힘들었던 시간도, 무거워진 마음에 버겁기만 했던 시간도 어느새 나는 다 잊은 것만 같다.

그리고 그립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리웠다. 오랜 시간 그렇게도 많이 아빠를 원망했음에도 그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전거를 타고 운동 다녔는데 이젠 그러지 못해서 답답하지는 않은지, 볼륨을 높여 노래 들으며 흥겹게 노래도 불러야 하는데 어떻게 해소하고 있는지, 방바닥에 이불 하나 깔아놓고 화투점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는데 이젠 그것도 다 새카맣게 잊어버렸는지, 하루종일 틀어놓고 있던 '야인시대'는 거기서도 나올 텐데 보고 싶을 때 마음껏 볼 수는 있는지.

남들에겐 사소한 것들이 우리 아빠에게는 전부였기에 하나하나 생각이 나서 자꾸 가슴 안에 걸렸다.

그래도 그곳에선 모두 아빠에게 친절하게 웃어주시겠지, 딸들이 끝내 다 하지 못한 몫까지.

죄책감인 건지 미안함인 건지 아빠를 생각하면 속이 텅 빈 것처럼 허하다.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니 어떠한 인기척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누고? 선미가?" 하며 안방에서 나와 웃는 얼굴로 맞아주던 나를 닮은 아빠는 없었다. 우리 집이 아닌 것만 같다.

일곱 식구가 북적거리며 한시도 조용할 틈이 없었던 우리 집이 떠올랐다.

긴 시간을 흘러왔지만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낯설지 않은 엄마의 잔소리 섞인 목소리와 아이같이 짓궂던 아빠의 표정, 무슨 꿍꿍이인지 둘이서만 속닥거리던 언니들, 끊임없이 투닥거리는 동생과 나, 그리고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막냇동생.

그 모든 것이 아직도 이렇게 선명하기만 한데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이토록 쓸쓸한 것이었구나.

그걸 모르고 그땐 그토록 어른이 되고 싶어 했는데, 내가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 부모님의 시간은 잃어가고 있었겠구나.

그땐 그걸 왜 몰랐을까.

그저 얼른 자라고 싶었고, 얼른 떠나고 싶었다. 철도 없이. 그 지붕 아래의 시간들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도 모르고서.


아빠에게는 어땠을까.

우리 다섯 딸의 아버지로 살았던 당신의 인생이, 지금의 당신 처지가.

이제야 후련할까. 나처럼 그리울까.


어쩌면 한평생 고됐던 시간들을 다 잊은 채 남은 날들만이라도 걱정 없이 편안해지기로 선택한 거라고, 끝까지 이기적인 딸은 내 맘 하나 편하자고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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