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직장에서 침묵을 착함으로 착각할까?
어쩌면 이 글은 독자님들께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존의 상식에 도전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도덕과 윤리의식이 높다 생각하신다면, 이 글이 상처가 되실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삶이 어렵다는 것은 우리만의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종종 착하게 산다는 것을 남을 돕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며, 불의를 바로잡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착함은 그런 이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사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삶에 비해 훨씬 더 쉬운 선택 일 때가 많습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때로는 싸움을 피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타협하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보다는 고개를 숙이며 외면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를 유지하는 지혜로운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자기 보호 본능에 가깝습니다. 갈등을 피하고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에너지를 덜 소모하고, 위험을 줄이며,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유리합니다. 외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를 착함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은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출근 시간을 자주 어기는 직원이 있습니다. 9시 정각에 출근해야 하지만 그 직원은 언제나 9시 10분에서 30분 사이에 사무실에 들어옵니다. 그 이유가 아이 때문도 아니고, 특별히 들리는 곳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매니저라면 이 상황에서 그 직원에게 따끔한 주의를 줘야 하고, 선배라면 출퇴근 시간을 잘 지키라고 충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구도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왜 모두가 지각쟁이 동료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으려 하는 걸까요?
지각쟁이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순간 관계가 파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매일 10분씩 20분씩 잘라먹는 근무시간을 말해 주는 일은 말하는 사람도 크나큰 모험입니다. 그가 규칙을 어김으로써 다른 동료직원이 입어야 하는 피해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은 지각쟁이의 적이 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지각쟁이와 껄끄러운 관계가 조성됩니다. 이로 인해 지각쟁이는 기분 나빠 퇴사하거나, 지적한 매니저에게 은근한 복수를 다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지각쟁이는 다른 곳에서 매니저를 험담하고 악소문을 퍼트리고 다닐지도 모릅니다.
매니저는 선택해야 합니다. 이 모든 위험과 피해를 무릅쓰고 지각쟁이에게 바른 소리를 할지, 아니면 착한 사람으로 남을지.
지각쟁이에게 가벼운 미소로 한번 웃어주면 모두가 평화롭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매니저는 착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후배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착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함이 아닙니다. 그저 삶의 난이도를 낮춰주는 좋은 방책일 뿐입니다. “악함” 의 반대가 착함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착하지 않은 삶은 투쟁을 요구합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부당함과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불편해질 가능성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용기나 정의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착함을 포기함으로써 그 반대의 정서인 의리와, 우정, 우리라는 동질감의 강력한 공격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착하지 않은 삶은 조직에서 고립될 수도 있고, 많은 적을 만들 수도 있으며, 때로는 실패의 쓴맛을 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착하게 살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착한 삶이 심리적, 사회적으로 더 쉬운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타협과 침묵, 순응은 갈등과 비난, 대립에서 오는 부담을 피하게 해 줍니다.
착함이 쉬운 선택인 두 번째 이유는 부채감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친절, 그리고 일상적인 양보, 겸손 을 행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부채감을 떨쳐 낼 수 있습니다. 착하다는 이미지는 우리를 도덕적으로 안전한 곳에 놓이게 하고, 사회적으로도 무난히 받아들여지게 만듭니다. 착함을 행했기 때문에 그다음 턴은 상대방의 보은을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착함을 포기하고, 더 큰 조직의 목표와 규율을 강조한다면 언제나 착한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을 떠안아야 합니다.
착하지 않은 삶, 즉 조직의 목표와 더 큰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싸우는 삶은 언제나 비난과 오해, 그리고 혼자 싸워야 하는 외로운 길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쉬운 길이 언제나 옳은 길인가? 착하게 살려는 우리의 선택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 때로는 부조리에 눈감는 우리의 착함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에 침묵할 때, 그 침묵은 가해자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착함은 단순히 갈등을 피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 필요한 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착하게 사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부채감 없는 착한 삶이 때로는 더 쉬운 선택일지 모르지만, 그 쉬움이 언제나 옳음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쉬운 길과 옳은 길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깊고, 진실하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