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린것만 좀 참으면..
가난을 이겨내는 단한가지 방법
동훈이와 윤서는 쌍둥이 오누이다. 어려서부터 용돈과 옷가지, 학용품, 스마트폰등 과하다 싶을 만큼 공평하게 대했다. 혹시라도 불평등한 사랑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옷을 사러 갔을 때도 비슷한 예산을 할당했다. 중학생이니 청바지와 티 정도 구매할 생각으로 각각 6만원 정도씩 할당 했다. 영등포 지하상가 입구부터 끝까지 1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옷을 입어보고 비교하고 마음 정하느라 1시간 반을 가다 서다 했다. 각자 쇼핑백을 서너개씩 들고 나서야 쇼핑이 끝났다. 오후 5시면 저녁 먹기는 애매 한 시간이다. 중노동 보다 힘든 쇼핑을 끝냈으니 동훈,윤서는 돌이라도 삼킬 기새 였다.
서둘러 타임스퀘어 지하 식당가를 찾았다. 영등포지하상가 중간쯤에 화장실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타임스퀘어 식당가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갓 구운 치즈빵을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재빠르게 지나 요깃거리를 찾았다. 떡복이 라면 분식집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 발걸음을 멈춘 곳은 소고기 샤브샤브 집이었다. 1인분 15000원, 우리가족이 네명이니 6만원이었다. 간단히 요기하기에는 너무 높은 가격이었다. 당장 배가 고픈 동훈이 윤서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나는 키오스크에서 메뉴를 검색했다. 기본으로 인당 샤브샤브 1개를 주문하는 시스템이었다. 내가 찾았던 메뉴는 샤브샤브 보다는 저렴한 다른 식사 거리였지만, 메뉴는 심플했다. 6만원은 생각지 못했던 부담스런 가격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자신들이 샤브샤브를 먹는 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키오스크에게 샤브샤브 3인분만 주문했다.
가족들이 먹고 싶다는 것을 사주는 것은 가장의 도리다. 3인분은 당연하다. 4인분을 시켜서 함께 먹을 수도 있지만 그중 내가 먹을 1인분은 선택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음식인가?. 음식값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인가? 둘다 ‘NO’ 였다.
보통 샤브샤브집에서 3인분을 시키면 같이 먹을 수 있도록 3인분용 보울과 재료를 주는데, 여기는 1인용 보울에 재료도 각각 나온다. 밀려드는 손님을 빠르게 소화 하기 위한 전략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자로 다닥 다닥 붙어 앉아서 식사하는 바테이블 이라서 전투적으로 먹고 빨리 일어나야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메뉴를 시켜주고 나는 이마트에 내려가 그날 저녁 시장을 봤다. 배고파서 정신없이 먹던 아내가 내가 없음을 알아채고 전화했다. 나는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이마트에 왔다고 했다. 사실 자리는 여유가 있었다. 엄마의 전화소리를 곁에서 들은 아이들은 먹던 숫가락을 내려놓았다. 윤서는 우리집이 가난하다는걸 처음 알게 되었다. 동훈이는 돈이 없어 함께 식사를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아빠를 상상했다. 엄마는 나의 쪼잔함에 짜증을 부렸다.
동훈이와 윤서는 이 순간의 기억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이였지만, 함께 밥을 먹지 못하는 가슴 먹먹한 순간을 그들은 앞으로도 쭉 기억할 것이다.
그 당시에 샤브샤브 1인분을 못 사먹을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날 예산을 초과하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아이들 먹이는 것이야 좋은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 몫까지 초과 예산에 집어 넣기는 싫었다.
내가 선택했던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돈을 좀 더 쓰고 가족과 즐거운 저녁을 함께 할 것인지, 돈을 안 쓰는 대신 아이들 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나는 이마트에서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알고 있었다. 가난하면 부끄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부끄러움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아빠의 모습을 기억하기를 바랐다.
윤서는 그럼에도 주문한 샤브샤브가 너무 너무 맛있어 밥한 톨 남기지 않은 자신을 책망했다.
동훈이 윤서는 성인이 될 때 까지 그 강력한 경험을 상처로 간직 하고 있었다. 단 한번도 돈을 절약하라는 말을 한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한달에 한번 받는 풍족하지도 않은 용돈을 남겼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를 이루고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부끄러움은 필연적이다. 나는 늘 선택의 기로에서 부끄러움을 선택했다. 당장 돈을 사용하면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었지만 돈을 사욯하지 않았다. 대신 노력과 시간을 투자 해서 그 부끄러움을 극복하려 했다. 부끄러운 것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 들였다.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돈으로 감추는 것은 너무 쉽다. 돈으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욕망의 대부분을 돈으로 살 수 있다. 남들 다가는 해외여행을 나만 못가면 부끄러우니까 여행을 계획한다. 여자친구에게 부끄러우니까 새차를 뽑는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니까 큰 평수 아파트로 전세를 간다. 사회생활 하기 부끄러우니까 명품하나쯤은 산다. 돈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부끄러운 문제들이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오랜시간 고통스럽게 노력해야 하고,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한다.
돈을 사용하는 대신 부끄러움을 선택할 수 있다면 자유라는 리스팩을 받을 수 있다. 돈을 쓰지 않고 모으는 과정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움의 연속이다.
동훈이와 윤서가 영등포타임스퀘어의 슬픈 추억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후 내가 부끄러움을 극복하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 왜 지금은 우리 가족이 부끄러움을 견디지 않아도 되는지 그들은 너무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