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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Dec 18. 2023

1. 여행의 시작점


여행의 시발점(始發點)을 어디로 잡아야 할까.

이번에는 숙소와 표를 예약한 순간으로 잡았다. 강릉으로 떠나기까지는 일주일도 더 남았다. 집과 사무실에서의 시간이 어찌나 더디게 흐르던지. 그 시간의 한 허리를 베어내어 ‘서리서리’ 내 가방에 넣어두었다가 강릉에서 ‘굽이굽이’ 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과정이리라.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계획을 세웠다.




여행 계획을 딱히 세우지 않는 편이다. 결혼하고 나서는 더욱. 우리 부부의 여행은 보통 두 단계로 이뤄진다.

첫째, 남편이 가고 싶은 식당을 먼저 고른다.

둘째, 내가 그 주변 갈 만한 관광지를 찾는다.


기동력과 경제력을 두루 갖춘 남편과의 여행은 이렇게 해도 무리가 없었다. 원하는 곳에 빨리 닿았고 원하는 것을 양껏 먹었다.

하지만 이번엔 계획이 필요했다. 뚜벅이인 나는 길 위에서 시간과 돈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었다. 장소와 음식을 선정하는 데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의 대원칙을 세워보았다.


첫째, 남편의 구미가 당기지 않은 장소에 가기.

둘째, 남편의 구미가 당기지 않은 음식을 먹기.


오롯이 혼자만으로도 재밌게 놀 거리를 찾는 일. 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즐거웠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짬을 내어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며 강릉을 두루두루 살폈다. 그래도 출발하는 날은 더디 오기만 했다.




드디어 맞이하게 된 12월의 첫 번째 목요일. 나는 오전 근무를 마친 뒤, 가방하나 덜렁 멨다. 사람들과 이른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서울역으로 향했다. 역에 도착하니 한 시간 반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자니, 이른 포만감으로 저녁을 먹지 못할까 걱정이 됐다. 유튜브를 보자니, 이 모든 것을 여행으로 삼기로 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아까웠다. 그냥 걸어 다녀보기로 했다. 마침 16시 강릉행 기차가 정차할 플랫폼 번호가 나왔다. 11번. 그리로 무작정 내려갔다. 너무 일렀는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홀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셔터 소리를 냈다. 세상이 노란 반투명 비단에 덮인 것 같았다. 햇빛이 고층빌딩, 기차, 철로 심지어 내 머리 위까지 차분히 내려앉았다. 사무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은근한 노르스름함을 느끼며 나의 몸과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기다림을 만끽하다 조금 지루해질 때 즈음,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는 출발시각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억울했지만 텅 빈 플랫폼을 걸으며 기다림이 주는 여유로움을 감사하게 됐다.


꼬박 두 시간을 달려 강릉에 도착했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해도 다음 행선지를 향해 달렸을 테지. 기차에서 내리니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평창올림픽 마스코트인 수호랑과 반다비가 나를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나, 이제 강릉에 도착했어.

안녕 수호랑, 반다비, 안녕 강릉!

2023. 12. 7.


덧 1. 나 홀로 여행에 남편은 홀로 반대했다. 잘 다녀오란 말도 해주지 않아 서운할 때쯤이었다. 여행 전 날, 사무실에서 그의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나 KTX 마일리지 있어. 특실로 바꿔줄게, 몇 시 차라고 했지?"

고맙다는 말을 끝낸 지 채 10분도 안돼 다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에이, 없다. 그냥 예매한 걸로 다녀와."

괜찮았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만의 다정함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오히려 바쁜 와중에도 마음을 써준 남편에게 새삼 고마웠다.


덧 2. 황진이의 시조를 좋아한다. 가끔 보고 싶은 사람에게 필사해서 보내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꼭 써보고 싶었다.


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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