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엄마들의 이름에 관하여
한가롭게 앉아 구름을 보고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름이 빛을 가리고 있어도 새어 나오는 빛까지 막을 수는 없듯이 사람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존재하는 한 숨기려 한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일부러 숨기는 걸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요.
한국 여자는 아이를 낳는 순간 누구 엄마로 불리기 시작하며 본인의 이름을 잃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이 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여겨졌기에 처음 만난 상대가 일부러 제 이름을 알게 하게 하려고 제가 먼저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곤 했습니다. 원체 누구에게서든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하던 저는, 큰 아이 뚜(큰 아이 별명)를 낳은 후 시어머니에게조차 ”뚜 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제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격언이 있죠. <Treat others the way you want to be treated. (내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하라.)>그래서 저는 다른 이를 그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시간이 흐르며 큰 아이 뚜를 사이에 둔 관계는 점점 많아졌습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차 제 이름보다 뚜 엄마로 불리는 빈도가 잦아지게 되었고, 그런 상황이 아쉬웠던 차에 베트남으로 나와서 살게 되어 적잖이 기뻤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서로를 이름으로만 부른다고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모든 한국인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내 이름이 없어져 가는 것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요! 그게 큰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어요. 마치 외국에만 나가면 외국인 친구가 저절로 생길 거라 여기는 것과 같은 수준의 착각이었지요.
여기 베트남에서도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는 서로 이름이 없습니다. 다들 자기 이름을 잃어가는 상황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비슷하게 본인의 이름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만 산다손 치고 체념하고 순응하는 것일까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다른 이들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 싶고, 저도 그렇게 불리는 게 좋습니다.
첫 대면에서 상대의 이름을 따내지 못하게 되는 건 저에게 상당히 불리한 상황입니다. 두세 번째 만남이나 그 이후에 이름을 물어보는 건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에요. 특히나 상대가 한국 문화에 상당히 젖어 있어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걸 꺼려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을 때는 더 물어보기 힘들어집니다. 저에게 당연하다는 듯 이름을 묻지 않고 뚜 엄마라고 계속해서 불러버리는 분도 있는데 그러면 저는 좀 속이 상합니다. 저라는 사람은 별 의미가 없고 제 아이 때문에 그 분이 저를 만나는 것인가 싶어져서요. 오해일 수도 있지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약간의 오기가 붙어서 어떻게든 알아내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에게는 한국인을 많이 만나 봐서 한국인의 문화를 잘 알고 있는 타국인 친구 두 명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한국인들끼리 서로 이름을 몰라도 그러려니 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는 받아들일 수 없는 눈치입니다. 그녀들은 심지어 제가 그녀들을 처음부터 이름으로 불렀을 때 한국인답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응? 도대체 한국인의 이미지는 어떻길래 그럴까요?
하루는 그중 한 친구가 제가 누군지는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분은 제 아이와 같은 학교 학부모일 뿐이고 개인적인 관계는 없었기에 이름을 알만 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의 이름을 듣고도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니 잠시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 사람의 외모도 묘사해주고 자녀들에 대한 설명까지 해주며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맞히게 도와주었습니다. 설명을 해주면서 그녀는 한국인이란 참으로 희안한 민족이다는 생각을 했겠다 싶어요.
평소 한국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타국인에게 자국민만의 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외국에서 사는 동안만이라도 어느 정도는 외국 문화에 익숙해져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보물 감추듯 자기 이름을 꽁꽁 숨기지 말고 좀 드러내 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들을 그들의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요. 한국인 외국인 따지지 말고, 그냥, 그저 자신을 잃지 말고 자신으로 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