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의뒷면 Dec 11. 2023

내 삶의 신호

변화

요일 아침 남편이 집에 없다. 금요일 출근하고서는 귀가하지 않았다. 무단 외박,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걸었다. 자다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그는 이제 집에 돌아가겠다고 별일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말했다. 어이가 없었다. 시간은 이미 토요일 오전 9시를 넘어섰다. 용납이 되지 않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 보기도 낯부끄러운 행동이었다.


아이들이 아빠의 행방을 궁금해했다. 감추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 아빠가 무단으로 외박을 했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른다고 말이다.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았다. 들끓는 마음을 감추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험 대비 수업을 하러 간 큰 아이가 오기 전에 어린 동생들의 점심을 먼저 챙겨야 했다.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 당당하게 집에 들어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꾸는 방법을 몰랐다. 아쉬운 대로 보조 문고리를 걸었다. 한창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 순간, 현관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현관에 걸린 문고리를 밖에서 풀으려 손목을 밀어 넣고 기를 쓰고 있었다. 어린 남매가 불안한 눈길을 건네며 나를 따라왔다. 아이들이 옆에 있었지만 무작정 문을 열려는 그를 강하게 제지했다. 예상대로 그는 사과는커녕 협박하고 고성을 질렀다. 그의 행동과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혼서류에 서명하겠다는 공수표를 던지며 나를 흔들었다. 현관을 강제로 밀고 당겨서 문고리를 뜯어냈다. 체구가 큰 성인 남자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이들과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고압적인 태도로 위협하는 그에게 단호하게 경고했다. 가느다 매달려있 마음 툭하고 끊어졌다.


얼마동안은 눈치를 보며 움츠러들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공격하고 화내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무시할 것이다. 그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했다. 어떤 날은 작은 실수에도 너그럽게 반응하다가 어떤 날은 발작하듯이 지적하고 꾸짖었다. 어떤 날은 무척 다정하게 굴다가 어떤 날은 차갑게 돌변했다. 어떤 날은 청소도 하고 부엌을 오가다가도 어떤 날은 이런 일이나 시킨다고 매섭게 비난했다. 어떤 날은 아이들을 보며 웃고 떠들다가 어떤 날은 아이들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키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어제는 허용된 일이 오늘은 허용하지 않았고 어제는 괜찮다던 일이 오늘은 안 괜찮은 일이 되었다. 사람 마음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지만 극단적으로 출렁이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웠다. 기다리다 가슴 아파하다 화가 났다가 안도했다. 설득도 해보고 애원도 해보고 윽박도 질러보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추측하고 고민하느라 쳐갔다. 매번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인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상황은 그의 기분에 따라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감정에 따라 나의 감정도 좋았다가 나빴다가 널뛰기를 했다. 모든 것을 다 해봤다. 힘들고 아프고 나약해질수록 점점 더 차갑고 무심해졌다. 요구를 하면 할수록 무시하면서 조롱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억지를 부리고 고집스러워졌다. 일부러 문제를 일으켜 자신의 결함을 나에게 덮어씌웠다. 불편한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 나와 아이들을 이용했다. 가까운 가족들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했다. 내면에 있는 공감과 사랑의 마음을 꺼내면 꺼낼수록 악독해졌다. 햇빛이 강해지면 옷을 벗는 것처럼 선하고 따뜻한 마음이 그를 달라지게 할 거라고 언젠가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붙들고 매달렸다. 때때로 다정해서 못되게 굴었지만 진짜 마음은 그게 아닐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소소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건강했고 모든 것이 조용하고 순탄했다. 하지만 그는 불안감이 넘쳐서 도무지 눈앞에 있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했다. 조용한 주말의 평화를 연휴의 안식을 시끄럽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그였다. 일관되고 편안한 관계 무사하고 태평한 오늘을 살지 못했다. 다가섰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하면서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나쁘고 못되게 가까운 사람을 괴롭히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잘못된 사랑, 그가 조장하는 방식으로 흔들리고 휘청거리면서 내 삶을 흙탕물속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감정이 풍부했던 나였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내 감정도 생각도 숨기고 억눌렀다. 버둥거릴수록 점점 더 바닥으로 빠져드는 늪이었다. 존중과 신뢰에 기반된 안정된 관계는 불가능했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서야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헛된 희망을 품고 끌려다니며 고통을 받았다. 이제 희생은 더 이상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함부로 마구 경계를 침범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찔러대는 타인이 있다. 그들에게서 나를 지키지도 못했고 지킬 방법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방비하게 당하면서 상처받은 피해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상대방도 나처럼 상처받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모든 타인이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못된 본성을 감추기 위해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모두가 나처럼 상대를 배려하느라 상처받 아파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너무도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이었다. 내가 상처받는 것도 막아내지 못하면서 타인이 상처받을 것을 걱정하다니 위선이었다.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면서 너를 지키겠답시고 교활한 상대 앞에 무력하게 나를 내어놓다니 교만이었다. 내 생각도 논리도 제대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했다니 어리석었다.


혼자 마음앓이했던 무수한 밤들은 나를 단단하게 들었다. 엄마라는 이유로  나로 사는 삶이 흐릿해지는 것이 싫어서 이를 앙다물고 눈물을 삼켰다. 숨 가쁘게만 살지 않으려고 무기력해지지 않으려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그것에 몰두하려고 했다.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가 커서 의존했지만 그게 내 모습의 전부는 아니다. 애정의 욕구보다 내 인생에 대한 애착이 크다. 아기가 잘 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했다. 그것이 내 삶을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끊임없이 나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진창 같은 루에서 그 작은 일이 나룰 빛나게 해 주었다.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한다. 처참한 수준으로 나를 집어삼켜 내 소중한 인생을 짓밟으려는 당신을 거절한다. 타인에게 나를 내어 맡긴 관심을 되찾아 내가 나에게 집중하고 몰두한다. 쓸쓸하고 불안하고 어색해서 휘청여도 홀로 서려고 입술을 깨문다. 내 인생이 빛나지 않으면 내 인생을 위협하는 위험 앞에서 나를 보호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지킬 수 없다. 아주 강한 존재이면서도 평소에는 자신의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다.

온유함이란 사납고 무서운 사자가 자신의 어리고 유약한 새끼 사자를 입으로 물어 다른 것으로 옮기려 할 때 부드럽게 살짝 무는 것을 말한다.(유튜브 서람 tv 중에서)

사진출처: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기필코 멀어지겠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