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노래자랑

by 고작가

“전국! 노래자랑. 빰 빠빠 빠빠빠~~" 일요일 점심이면 한결같이 들리던 송해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지 몇 년이 지났다. 구수한 송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전국 노래자랑”이 낯설어서였을까, 요즈음은 잘 보지 않게 된 프로그램이 되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전국 노래자랑”은 일요일이면 보는 사람은 딱히 없어도 거실 TV에 항상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신문 보시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함께 흥얼거리시기도 하고, 엄마는 집안일을 하시면서 재미있는 참가자가 나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웃으며 TV를 보시던 장면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나에겐 아주 오래된 사진첩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추억의 책장 같은 노래자랑을 TV가 아닌 직접 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주에 내려와서다.

제주도의 추석명절도 육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추석이 오기 전 주에 산소에 벌초를 가는 것을 시작으로 명절 맞을 준비는 시작된다. 제주시에 살던 둘째 아들, 육지에 살고 있는 첫째 아들이 오랜만에 서귀포에서 만나서 예초기를 메고 선산에 올라 벌초를 한다. 고향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그간의 안부를 나눈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아들, 딸, 손주들과 며느리 각기 다른 곳에 살던 가족들이 부모님이 살고 계신 시골집으로 모인다. 적막했던 시골마을은 모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제주말, 육지말이 섞여 시끌벅적하고 사람 사는 동네처럼 활기차다.

반면에 육지에 살다 내려온 이주민들의 추석명절은 다소 조용하다. 명절을 쇠러 육지로 올라가는 가족들도 있고, 육지로 가지 않고 서귀포에서 간단히 음식준비를 하고 거주하는 가족과 동쪽이나 서쪽으로 여행을 가거나,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연휴를 보내기도 한다. 10월이지만, 충분히 더운 날씨에 여름바다가 아쉬운 관광객들은 바다에 들어가 물놀이를 즐기거나 서핑을 하기도 하는 조금은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서귀포의 추석명절은 시골마을과 휴양지가 적절히 섞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연휴가 시작되고 점심때쯤이면 신효 마을회관의 대형 스피커에서 공지사항을 알리는 청년회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신효 청년회에서 알려드립니다. 10월 5일. 일요일 6시에 마을회관에서 노래자랑이 열립니다.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노래자랑 당일 오전까지 마을회관에 오셔서 참가 희망서를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명하신 초청가수들도 오시고, 경품행사에 상품도 푸짐하게 준비했습니다. 삼춘들 모두 나오셔서 구경해 줍서예.”


제주살이 첫해에 우리 가족은 시끌벅적한 소리에 끌려 마을 노래자랑을 구경했었다.

단골 편의점 사장님이 무대에 올라 열창을 하시고, 육지에서 내려온 어린 손주들이 아이돌 그룹 노래를 부르며 춤도 추는 모습이 TV속 옛날에 보았던 “전국 노래자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칭 신효의 딸이라는 사회자 아줌마의 맛깔난 사투리 진행은 100% 이해할 순 없었지만, 재밌고 여유 넘쳤다. 처음 보는 라이브 노래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손뼉 치다 보니 경품행사를 끝으로 노래자랑은 끝났다. 1톤 트럭에 가득 실린 사각티슈는 마을회관 앞마당에 모인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제주에서의 첫 추석명절을 보내고, 시간이 흐르다 보니 마을에 사는 지인들과 식사도 자주 하게 되고 노래방도 가서 노래도 부르며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고 있다.


(지인 1) 고실장, 니 저번에 보니까 노래 좀 하던데, 이번 추석 노래자랑 함 나가 보는 게 어때?

(지인 2) 그래. 실장님. 1등 하면 상금이 30만 원 이라더라. 고실장 님 덕분에 소고기 한번 구워보자.

( 나 ) 아이고, 형님. 술 먹고 노래하는 거랑, 맨 정신에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거랑 달라요. 난 그런 거 못해. 해본 적도 없고. 그냥 소고기는 내가 사드릴게.


다시 돌아온 추석명절. 마을에서 막내 축에 속하는 나는 어쩌다 보니 신효 노래자랑 참가자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낯선 제주도 시골마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게 되다니. 하물며 50 평생 술 안 마시고 맨 정신에 노래를 불러 본 적도 없는 내가.

“마을 사람들이 200명 정도는 모일텐데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지, 연세 드신 삼춘들이 많으니까 트로트를 불러야 하나, 트로트는 너무 올드하지. 신나게 댄스곡을 아니 그건 불러 본 적도 없는데.” 막상 연휴가 시작되자 나는 일생일대의 큰 고민에 빠졌다. 이미 저번주에 노래 연습 해야 한다고 형님들과 노래방까지 다녀왔는데, 지금 와서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김없이 마을회관 앞마당에 빠레트를 쌓고 합판을 올려 무대가 설치되고,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들이 줄 맞춰 놓였다.


12명의 참가자 중 두 번째로 노래를 부르게 된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무대 뒤에서 캔맥주를 홀짝였다. 청심환을 드시는 삼춘부터, 낮부터 막걸리로 예열을 하신 얼굴이 벌건 삼춘들도 계셨다. “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얼른 해치우고 편하게 맥주나 마시자.”

무대에 올라가서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노래는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나는 내 뒤 열 분 참가자 분들의 노래를 맘 편히 즐겼다.

참가자들의 노래가 모두 끝나고 경품행사가 시작되었다. 1등은 무려 양문형 냉장고다. 이 냉장고를 타기 위해 육지에서 내려온 4살배기 손녀를 대동하신 삼춘들(일인당 경품권 1장을 준다)은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경품권이 든 투명 박스를 주목하신다.


사회자 아줌마의 마이크에 마을사람들 모두가 집중해 귀기울이는 순간.

5등은 5명. 미깡 과즐 세트. 71번, 113번.....

4등은 4명. 맛나니(귤나무에 치는 농약 이름이다) 한박스. 12번, 67번.....

3등은 3명. 근사미(제초제 이름이다) 한박스. 59번, 151번.....

1등은 1명. 양문형 냉장고(무려 LG제품) 39번

이날 양문형 냉장고는 앞동산에 사시는 고여사 님 둘째 며느님이 타가셨다.

경품도 마을에 오래 산 순으로 주는 건지. 내심 냉장고에 기대를 걸고 계셨던 유여사님의 깊은 한숨 소리가 속내를 대변해 주었다. 우리 가족은 작년에 이어 각 티슈 3개를 들고 돌아갔다.


아! 잊고 있었던 노래자랑 상품이 남아있다.

노래자랑 참가자 전원에게는 농협 1만 원 상품권 1장.

인기상 1명. 농협 1만 원 상품권 3장.

우수상 1명. 농협 10만 원 상품권 2장.

최우수상 1명. 농협 10만 원 상품권 3장 이 돌아갔다.


나는 결단코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다. (두둥) 하지만 무려 우수상에 빛나는 농협 상품권 20만 원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이 영광의 상품권을 어떻게 했을까? 1초의 망설임 없이 유여사님께 봉투째 드렸고, 다시 유쾌해지신 우리 유여사님은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시며 두 손으로 봉투를 받으셨다.

비록 참가를 독려한 형님, 누나들에게 소고기를 사느라 10만 원을 지출했지만, 어느 해보다 즐거운 추석 명절을 보내 모두가 행복한 한가위였다.

아마도 내년 추석 연휴에는 1등에 도전하기 위해 노래방에 가 있지 않을까?

이전 01화노인과 노견의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