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싶'었던 아이를 '살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기까지
(1, 2의 스포가 있습니다.)
★ 사람들은 허무한 결론이 믿기지 않으니까 음모론을 만들어 내고, 누군가 뱉어 낸 음모론은 소문이 되어 돌아다니고, 그렇게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다보면 기정사실이 되고 그런 거죠. (p.115-116)
★ "살아 보믄 욕하는 사람들은 딱 요만큼뿐인 기라. 대부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묵묵히 사는 사람들뿐이다. 근데 우째서 욕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나 카믄, 꼭 욕하는 놈들이 눈에 띄게 티를 내서 안 글라. 믿어 주는 사람들은 그냥 티도 안 나게 지켜보기만 하고. 그라니까 티를 내 줘야 한다. 여기 니를 믿는 사람도 있다, 이래. 그라믄 죽을 사람도 산다카이. 그기 사람 살아가는 세상인 기라." (p.164)
★ 그런 날이 있다. 별일 없이 물 흐르듯 하루가 흘러가는 날. 주연은 오늘 그런 날을 겪었다. 어쩌면 주연에게 이런 날이 아주 가끔은 찾아올지도 몰랐고, 그런 하루들이 조금씩 더 자주 찾아와 자신을 평범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189)
<죽이고 싶은 아이>의 출판으로부터 3년, 이야기는 마지막 재판으로부터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주연을 욕하기 바쁘며, 주연의 가족은 신상까지 털리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밝혀져도 다를 것은 없습니다. 주연은 여전히 과거의 행실을 이유로 사람들에 의해 손가락질을 당하고, 서은을 잃은 주연은 입을 닫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주연은 어느 날부터 서은을 보기 시작합니다. 죽은 서은이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주연은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데......
이꽃님 작가님의 <죽이고 싶은 아이 2>입니다. 이 책이 2권이 나왔다고 들었을 때 정말 많이 놀랐는데, 그 이유는 작가님이 후기에서 밝히신 것처럼 '이미 하고 싶은 얘기는 1권에서 다 하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작의 다소 비극적인 결말로부터 주연과 서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점은, 캐릭터에 애정을 품고 있던 독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반길 만한 일입니다. 다만, 1권이 워낙 걸작이었기 때문에 2권이 소위 거친 말로 '뇌절'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실제로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고, 전작의 마성을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만, 2권을 통해 작가님이 하시고자 했던 주연의 이야기가 드디어 완성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 명의 아이가 사람과 사회에 의해 벼랑 끝까지 몰리는 이야기를 1권에 담아내었다면, 그 아이가 다시금 사람에 의해 벼랑 끝에서 돌아오는 이야기를 2권에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충분히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개인에게 무분별한 증오를 퍼붓는 일이 결코 '정의'가 아님을 여전히 깨닫게 합니다.
전작의 슬로건이 Fact is simple, 이었습니다. 진실은 지극히 간단한데, 사람들은 그 진실에 숨겨진 배후가 있을 거라고 마음대로 상상하며, 진실에 얽힌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한 문장으로 말끔하게 담아낸 슬로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2권에서는 전작에서 끝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다 보니, 서은의 죽음에 전작에서 밝혀지지 않았던 비밀이 추가되었고, 이것이 간단했던 팩트를 불필요하게 복잡한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오히려 서사가 다소 지루해지더라도, 특별한 반전 없이 등장인물을 살리는 과정에만 집중하는 것이 괜찮았을 듯합니다.
실제로 반전을 제외하더라도, 작가님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등장인물이 삶을 되찾는 과정을 뻔하지 않은 전개로 그려냈습니다. '주연이 서은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주연은 서은을 괴롭혀왔으므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회 여론은 상당히 그럴싸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주연은 억울한 누명을 쓰지는 않았지만, 서은과의 일이 세상에 알려져 계속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살인자까지도 주연의 잘못을 탓하는 상황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면서도 그럴싸합니다. 요컨대, 증오를 주도하는 사람들과 거기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꾸준히 교차됨으로써 지루하지 않은 서사 전개를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자극적인 서사 전개를 택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의 주제를 깨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전작들을 그래도 적지 않게 접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님의 강점인 '사람과 사회의 적나라한 묘사'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이버 렉카의 신상털이 등 요즘에도 문제로 남아 있는 사회 이슈들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고, 사람의 불필요한 증오와 호기심이 한 사람을 망가뜨리는 과정도 적나라합니다. 그러나 상술했듯, 이것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점이 강점입니다. 적나라하지만 자극적이지 않게 묘사하는 스킬은 작가님처럼 청소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어야만 가능할 듯합니다.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본 작품인 만큼 형사, 변호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에 대한 서사도 탄탄해졌습니다. 특히 이번 작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주연의 엄마와 아빠, 전작에서는 종이로 만든 악당처럼 평면적으로 느껴졌던 그들이, 점차 딸을 이해해 나가면서 입체적인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행운이 너에게 찾아오는 중>의 한계가 그 지점이라고 생각했던 저의 입장에서는, 이번 작품에서 작가님이 한계를 극복하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충격적이고 적나라한 서사에 대해 나름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던 전작에 비해, 이번 2권에서는 작가님이 작품에 조금은 지나치게 이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9면에서 나왔던, '어쩌다 증오의 사회가 되었을까'와 같이, 등장인물의 말에서 갑자기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경우가 드문드문 서사에 있어 몰입을 조금 해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주연에 대한 불필요한 동정이나 갑작스러운 개과천선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입장에서 그것이 제일 쉬운 전개일 텐데도, 감사히 그런 전개를 택하지 않아 주셨습니다. 대신 사람과 사회에 의해 벼랑 끝에 몰린 한 청소년이, 몇몇 사람에 의해 벼랑 끝에서 스스로 돌아오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주셨습니다. '실은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밤새 뒤척이면서 생각한 게 이 정도다?' (p.137)와 같이 솔직하면서도 서서히 다가와주는 등장인물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마음 쓰지 말고, 공부하기 싫고 니 인생 걱정하기도 싫으면 차라리 오늘 저녁 뭐 먹을까 그 걱정이나 해라.' (p.195)고 증오를 일삼는 이들에게 일갈하는 인물 등등, 그들의 묘사는 상술했듯 다소 감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영양사가 식판에 조심스레 올려준 귤처럼 따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인 저는 읽어나가면서도 '주연의 행동은 결코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계속 고민하다가도 '그래도 주연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었습니다. 전작에서 독자는 여론에 휩싸여 어느새 주연을 죽이는 데에 일조하다가 진실을 알게 되고 반성합니다. 이번 작에서 독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주연이라는 인물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 점에서 2권은 불필요한 서사와 작가의 개입이 한계로 느껴지더라도, 뇌절이 아니라 정말로 발매되었어야만 했던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인생에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 말에 휩쓸려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어. 더는 그런 말들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p.206)
이 이야기는 결국 어느 중학생이 '작가는 작품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1권에서 이미 작가가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조금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3년이 흘러 2권이 나오는 지금도, 여전히 사회는 변함없이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 그 당돌한 중학생에게 개인적으로 무척 감사했어요.
표지를 누가 그리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뛰어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1권 표지에서 서은을 바라보는 주연과 정면을 바라보는 서은이 아직도 인상에 많이 남습니다. 2권에서 드디어 두 아이의 표정을 볼 수 있게 된 우리는, 앞으로도 얼마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살아가려 할까요. 중요한 건,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된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말들에 휩쓸리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습니다. 자신이 주연의 입장이든, 주연을 바라보는 입장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