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왕 Sep 11. 2023

가을 경주

몇 해 전만 해도 생면부지의 남이었을 당신과 함께 경주의 마룻바닥에 마주 앉아서 천년의 누룩으로 빚었다는 술이나, 청요릿집에서나 먹던 저기 먼 지방의 백주 같은 것을 나누어 마신다.

밤은 선선하고 방은 아늑하다.  좋아진 기분을 모두 가을 경주의 탓으로 떠넘기며 몇 병이고 당신과 술을 비운다. 얼굴이 붉은 내가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를 우리가 사들고 온 싸구려 먹태만큼이나 곱씹으며 당신에게 잘도 재잘거린다. 당신은 코를 긁적이거나 삐딱하게 끌어안고 있던 한쪽 무릎을 이따금씩 바꿔가며 가끔씩 내 얘기에 고개를 주억댄다.

사 온 술이 다 떨어질 때 즈음, 지난 연인이나 마음이 가는 사람이나 새로 만나는 애인에 대한 이야기들을 꺼내어 마시곤 다시 얼근히 취한다. 그러다가 옆방에서 '똑똑' 하고 벽을 두드리며 주의를 주는 소리에 각자의 입을 화들짝 가렸다가 이내 서로의 얼굴을 보고는 나직이 킥킥댄다.

당신이 잠들고 나서 남은 술을 마저 마시다가 사람의 마음 둘 곳 같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늘 훌쩍 떠나는 것보다 어딘가에서 오래 정착하는 일이 어려웠던 나는, 당신과 내가 저기 보이는 큰 무덤과 무덤 사이만큼 가까워진 것 같아서 기뻐하다가, 금세 우리가 시나브로 멀어지며 몇 해 전의 사이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보고 슬퍼하기도 하는 것이다.

선잠을 자고 나서 우리가 묵었던 방을 걸어 잠그고 나온다. 그러다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올라서 발걸음을 돌려 낙서 가득한 벽 한편에다가 메모지에 몇 글자를 적어서 걸어두었다.

'가을엔 서로의 눈빛이 제철'

작가의 이전글 감사 인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