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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Nov 26. 2023

거제 고백

터미널에서 거제행 승차홈에 앉아 오도카니 버스를 기다리다가, 광고판에 '거제로 올 거제'라는 귀여운 지역 홍보 문구가 적혀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번 설에는 고향에 내려올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말 같기도 하고, 엄마가 상경한 딸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합니다. 올 거제라는 말의 속 뜻은 너 올 거냐고 묻는 말이 아니라, 너를 보고 싶다고 하는 고백에 가까운 말일 것입니다. 


고백은 나의 무르고 연한 을 상대방에게 숨김없이 보여줘야 하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활짝 열리는 순간은 우리가 한없이 약하고 상처받기 쉬워지는 때고요. 그래서 가끔 '거제로 올 거제'처럼 에둘러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이나 표정만으로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얼굴을 마주하고 해야 되는 고백들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사과하고 싶거나, 끝내 사랑하고 싶은 일이 그렇습니다. 주로 오랫동안 켜켜이 쌓아온 마음을 꺼내야 할 때 그렇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 먼 거제로 온 이유도 바로 그런 고백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처럼 나약한 사람은 해묵은 마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으므로 거제의 얼굴을 마주하고 어떤 고백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저는 이곳 시장에 들러 유명한 국밥을 한술 뜨기도 하고, 독봉산 자락에서 아직 물이 덜 든 단풍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좁은 해안 골목에 있는 고양이들과 놀다가, 정원 같은 카페에 들러서 조약돌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케이크도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랑한 해안을 평화롭게 거닐어 보기도 했고요.

방은 하루에 4만 원 밖에 하지 않는 작은 민박집에서 묵었습니다. 한 칸짜리 방이었지만 빛이 썩 잘 들고 바닥이 따뜻해서 한 몸 뉘기에 더할 나위 없었어요. 바다가 가까워서 밤바다를 보러 나가기에도 좋았고요. 이 여행의 모든 게 당신과 나의 몸과 마음이 가난하던 시절 같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헤어지던 당신이 아직 울음도 제대로 그치지 못한 채, 제게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당신은 겁이 많지요?'라고 물어보신 그 슬픔을 기억합니다. 제 뺨과 눈썹을 조심스럽게 만지던 손길도 기억하고요.

고백하자면, 저는 꼭 행복이 아니라 그때의 애달픔 같은 것을 먹어가며 어찌어찌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바라시던 모습과 달리 저는 아직도 사랑 하나를 제대로 해내는 것을 두려워하여 늘 다시 외로움으로 도망치는 이런 볼품없는 어른이 되었고요. 대체 당신은 어떤 힘으로 나를 그렇게 다정하게 사랑해 주셨었는지 아직도 저는 궁금하기만 합니다.


당신이 계신 곳은 늘 따뜻하신지요. 이곳은 이제 더 쌀쌀해질 것입니다. 그래도, 그리 머지않은 날에 봄이 오겠지요? 어느 따뜻해지는 날, 그때는 그리운 이와 함께 오겠습니다.

제 고백은 끝이에요. 사 온 음식이 식기 전에 얼른 좀 들어요. 술도 한 잔 하시고요.
당신도 짠.
나도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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