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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Jul 09. 2024

늦봄 속초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보다는 그 사람의 사진을 보고 싶고, 사진보다는 그 사람의 글을 읽고 싶고, 글보다는 그의 얼굴을 읽고 싶어 짐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내 사랑의 깊이를 잰다. 다만 이제 얼굴도 글도 볼 수 없게 다면 다시 책으로 되돌아가서 혹시 당신을 닮은 문장이 없나 뒤적여보곤 한다. 여러 글귀 중에서 꼭 그럴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행복’이나 ‘웃음’ 같은 긍정적인 낱말이 아니라 ‘울음’이나 ‘상처’ 같은 슬픈 어감의 단어들이었다.


오래전 당신은 울고 있었고, 그 울음은 나를 그리로 불렀다. 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과 같은 말이므로, 그 울음이 나를 거기에 데려간 것이다. 누군가 나더러 왜 당신을 사랑했느냐고 물으면 당신이 서럽게 나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우리가 속초로 가기로 한 날에 비가 왔다. 하필 여행을 떠나는 날부터 동해안의 호우주의보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 내내 속초는 먹구름을 가득 안고 울었다. 서울에서 가평까지, 가평에서 인제까지, 인제에서 양양까지, 양양에서 다시 속초까지. 당신이 우는 일로 나를 불러냈듯, 속초가 우는 일 역시 우리를 그곳으로 불렀다.




안녕하세요. 속초에는 비가 옵니다.


예전에 당신이 제게 왜 이렇게 슬픈 글을 쓰느냐고 물었던 게 불현듯 떠올라서, 그리고 그 물음에 대답을 해 드리고 싶어서, 그러나 딱히 이 답변을 전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윤척없이 편지를 써봅니다. 왜냐하면 속초에 비가 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로 슬픔에 대해 씁니다. 제가 슬픔에 대해 쓰는 까닭은 슬프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는 슬퍼지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제가 외로움에 대해 쓰는 이유도 이와 같고요. 다만, 사랑에 대해 쓰는 이유는 더 오래 사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슬프기 싫어서 슬픔에 대해 쓰는 일이나, 외롭고 싶지 않아서 외로움에 대해 쓰는 일, 더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에 대해 쓰는 일이 다 다르지 않은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그것들이 모두 울음을 우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누군가를 부르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겠습니다.


오래전 당신은 저를 떠나면서 제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달래주었습니다. 저는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 왜 당신이 저를 떠나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요. 하지만 저는 이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써도 제가 타인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걸 이해하는 일은 먼 미래의 나에게 맡겨두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에 당장은 그슬퍼하는 일이사랑하는 일을 마저 하기로 했고요.


이제 우리는 서로 멀리 살아가고, 시간은 흘러가고, 슬픔만이 오래 남겠지요. 비단 당신뿐만 아니라 제가 만나고 사랑했던 모든 것들과 저는 결국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속초의 봄을 지나면서 봄을 지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서로의 어깨를 부딪히며 좁은 길을 걷는 것처럼. 어느 순간 여름을 걷게 될 것이고, 아무리 크게 비틀거려도 서로의 몸이 닿지 않게 되는 슬픔이 찾아오겠지요.


저는 울음 때문에 사랑을 알아채기도 하고, 그쪽 돌아보기도 하지만, 꼭 우는 것만으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속초에서 우리는 서로가 품은 상처들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한번 울어보자고 그것을 구태여 들추어 보는 이는 없었습니다. 입에 물고 있는 술 한 모금을 삼키는 것으로 대신해 가며, 우산을 들고 속초 밤바다의 해안선을 따라 함께 걷는 일들로 서로를 일으켜가며, 그런 사랑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을 겪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언젠가 이해할 수 없는 다정함과 안온함을 나누는 일도 있겠지요.


아침에 일어났더니 속초는 이제 비가 그쳤습니다. 당신도 울음을 그치셨나요.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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