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 하나가 있다. 그 문을 열면 내가 오래 그리워하던 날들이 거기에 있다.
무화과 숲을 읽다가, 밤에는 눈을 감고,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꾸었다는 대목에서 또 내가 운다. 전에도 읽다가 몇 번이고 거기서 혼자 울어본 일이다. 그때는 아마 슬픈 일이 있었을 때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슬프지 않은 날에도, 이 시를 읽으면 그 슬픔으로 돌아가곤 한다. 슬픈 날에 나를 찾아와 달래주던 시를, 지금은 내가 먼저 찾아가서 괜히 들쑤시고는 슬퍼하고 오는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도 슬프고 싶었는지 이제는 그 이유조차 모호하지만, 슬픈 날에도, 그렇지 않은 날에도,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나를 ‘어떤 문’으로 데려가 줄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심지어 뭇사람들도 사실 이런 감정을 느껴가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지나친 억측까지 하기도 했다. 카타르시스가 별것인가. 아마 자신이 지금 아픈 일이 있지 않음에도, 아픈 글과 시를 부러 찾아가서 읽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비슷한 마음이겠지.
반대로 좋은 추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세상이 온통 견뎌야 하는 일 투성이 임에도 돌아가신 엄마의 사진이나 영상 같은 것을 찾아보고 웃고 또 울며 다시 힘을 내곤 했다. 그것을 쭉 지켜보던 나는, 그 이가 다정한 날에도, 혹은 그렇지 않은 날에도 ‘어떤 문’ 앞으로 다다를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현상을 통해 기억이나 감정이 되살아 나는 일을 꼽아보자면 또, 꿈 얘기가 빠질 수 없다. 나는 깊은 잠을 잘 자지 못해서 꿈을 자주 꾼다. 그런데 이 꿈속의 일이라는 게, 현실의 일과 묘하게 이어지거나 연장선상의 일일 때가 많다. 이를테면 내가 컴퓨터를 고치기 위해 밤새 씨름하다 잠이 들었는데 그것을 고쳐낸 꿈을 꾸었다든지, 누군가와 다투고 헤어졌는데 서로 울면서 화해하는 꿈을 꾸었다든지 하는 일들…. 그래도 꿈은 역시 꿈인지라, 깨고 나서 조금 지나면 금세 휘발되어 나중엔 무슨 꿈을 꿨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끔, 기억에 오래 남는 현실감 있는 그런 꿈들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돌아가신 엄마가 나오는 꿈을 그렇게 꾸곤 했다. 꿈에서 같이 바다도 가고, 김밥을 싸 들고 소풍도 가고 그랬는데, 마지막에 엄마는 늘 무릎베개를 해주다가 자기가 잠이 들면 사라지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제일 싫을 때가 꿈속에서 졸릴 때라고 했다. 엄마가 또 사라져 버릴까 봐 그렇다고 했다. 그 말이 너무 슬펐던 나는 말없이 그이를 껴안고 종일 울기만 했던 그런 날도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예전 연인과 마지막 통화를 하던 꿈이 그렇다. 전에는 한참을 서러워서 듣기만 하다 끊었던 전화를, 꿈에서는 야무지게 받아서 부드러운 위로도 건네고, 그녀를 어떻게든 또 웃겨주고 싶어서 농담도 건네고, 잘 지내라는 인사도 건네고 그랬다.
어제도 비슷한 꿈을 꿨다. 올해는 아직 날이 따뜻해서인지, 친구들과 단풍이 하나도 없는 단풍놀이를 가게 되었다. 그게 너무 아쉬웠는지, 새벽꿈에 단풍이 흥건하게 물든 오솔길을 걷는 꿈을 꿨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렇게 물이 들었냐며 참 운이 좋다고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눈앞에 선명한 단풍과는 달리 나와 함께 온 이들의 얼굴은 저만치서 뿌옇게만 보였다. 잘은 모르지만, 그쪽을 향해 내가 빨리 오라고 손짓 한걸 보니, 아는 사람들이었음은 분명하다. 거기에 그리운 얼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문 하나가 있다. 내가 아주 오래 그리워하던 날들이 그 문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어떤 것들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살포시 내 손을 잡고 함께 문고리를 돌려준다. 밤에 눈을 감고, 아무에게도 혼나지 않으며, 그저 사랑만 해도 괜찮은 꿈을 꾸었다던 어떤 이처럼. 사랑해도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내게도 무수히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떤 꿈은 꾸면서도, 아주 꿈은 아닌 듯 생생하기도 합니다.
이따금, 눈 감아도 보고 싶은 그런 순간이 당신께도 여럿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