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록 Jun 26. 2022

밤 12시 반에 설거지가 끝났다

밤 12시 반에 설거지가 끝났다.

휴우.  


냉장고 문에 붙어있는 ‘먹은 음식 기록표’가 8일째 텅 비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먹은 것부터 적는다.      


점심 : 참치 야채비빔밥

저녁 : 근대 된장국, 현미밥, 메밀국수     


'먹은 음식 기록표'의 남은 빈칸들에는 주로 먹었던 것들을 선을 신경 쓰지 않고 죽 적는다.

(수박, 오이, 참외, 파프리카, 토마토, 초당 옥수수.)

여름의 주인공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보통은 장을 보고 온 날에 냉장고 정리를 하는데 요근래 너무 바빠서 저번 장에서 사 온 야채들을 여기저기 창의적으로 얹어놨다. 냉장고 문 가운데 있는 음료 칸에는 브로콜리, 참외, 비트가 비좁게 들어가 앉아있고 열무김치를 담으려고 사놓은 열무와 얼갈이 대여섯 봉지는 맨 위 칸에 켜켜이 쌓여 누워있다.      


서랍 칸을 열어보니 맨 위에는 녹즙용으로 주문해서 넣어놓은, 잎 크기가 아이 등짝만 한 녹즙용 케일이 꽉 들어차 있고 둘째 칸에는 역시 녹즙용으로 사다 놓은 당근 여덟 뿌리와 3분의 1쯤 먹고 남은 건데도 크기가 아이 머리만 한 양배추, 시들어가는 부추 한 단이 있다.


아이들 학교 텃밭에서 따온 어른 팔뚝만큼 긴 가시 오이 두 개와 식료품점에서 사 온 아이 팔뚝보다 조금 짧은 오이 세 개, 이상하게 두꺼워서 양배추 맛도 조금 나는 양상추, 생각보다 싱싱함이 오래가는 깻잎순 한 봉지와 스머프 집처럼 신비롭게 생긴 꼬마 새송이 버섯 한 봉지가 들어있다.  

      

주인의 손길이 세심하게 닿지 않아 서서히 기가 죽어가는 그들을 위로하려고 당근은 한쪽으로 몰아세우고 특별 관리가 필요한 오이와 양상추는 잘 보이는 오른쪽 끝에 놓고 가장 여린 녀석인 부추를 제일 위에 올리면서 남은 공간 곳곳에 깻잎순과 꼬마 새송이 버섯과 양배추를 끼워 넣었다. 정리가 얼추 되었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

휴우.


냉장고 문에 붙어있는 또 다른 종이인 ‘냉장고 안 식재료 표’를 점검한다. 먹어서 없는 녀석들은 지우고 서둘러 손길을 주어야 할 녀석들에는 동그라미를 친다. 식료품점에서 새롭게 데려와야 할 녀석들 이름을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한다.

‘돌김, 참치 캔 셋, 멥쌀 현미 2킬로, 찹쌀 현미 2킬로.’      


이렇게 다양한 생명들이 우리집에 와서 우리에게 먹히고 찌꺼기를 남기고 그릇에 붙어있다가 씻겨 나간다.


표에 적혀있다 지워지는 그들의 이름. 이름 너머에서 생생하게 존재하는 그들. 더 천천히 깊게 만나고 싶다.


얘들아, 잘 시간에 자꾸 문 열고 시끄럽게 해서 미안.


새벽 2시 반에 냉장고 정리가 끝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