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연솔 Mar 27. 2023

김밥처럼 살기

산뜻한 미움


요즘 글을 쓰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이대로 포기해버릴까? 왜 타고난 재능이 없을까. 왜 이렇게 밖에 못쓰지? 너무 괴로워하다가도 그래도 글이 너무 좋아서, 그깟 포기가 그렇게도 싫어서 오늘도 한글 파일을 연다. 그러면 새하얀 설원 같이 광활하게 펼쳐진 빈 공백이 반짝 반짝 빛을 내며 나를 반긴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서 쓰고 싶은 말이 많을 때는 얼른 뛰어들고 싶은 초원처럼 느껴지는데, 쓰기 싫을 때는 추운 날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눈이 가득 쌓인 언덕 같다. 잘못 밟으면 미끄러질 것 같아서 그냥 나서기를 포기하는 그런 날처럼. 글을 쓰는 걸 이내 포기해버리고 싶다.

오늘 같이 이렇게 글이 지지리도 쓰기 싫어지는 날에는 글자들이 나를 기만한다. 심장 부근께 에서 간질거리기만 할뿐, 밖으로 나가지는 앉는다. 나는 가만히 설득해보곤 한다. 우리 이제 좀 움직일까? 마음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손끝으로 천천히 움직여보자. 그러면 글자들은 내 심장을 더 세게 쥐고는 내가 나갈 것 같니? 호탕한 비웃음을 흘리면서 나를 두렵게 만든다. 그 순간은 정말이지 두렵고 불안하고 무섭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다. 영영 글을 쓸 수 없으면 어떡하지?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 말이다.

상상해보곤 한다. 글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고 싶은 글이 나와 있고 그 글들을 내가 골라서 김밥처럼 말아버리는 상상. 글의 주제가 되는 글감들은 하얀 쌀밥처럼 얇게 군데군데 곳곳에 배치하고, 당근과 단무지 같은 색감이 뚜렷한 에피소드가 되어주는 글감은 적재적소의 위치에 배치하기 위하여 좀 더 신중하게 위치를 고른다. 식감을 살려주는 시금치도 빼놓을 수 없다. 글에서는 약간의 위트와 재치로 표현될 텐데 내게 없는 부분이지만 편식하지 않고 꼭 넣기를 염원해보며 김밥을 만다. 이런 식으로 후루룩 말아내어 한 끼 든든한 식사와도 같은 글이 되었으면. 읽을 땐 간단하지만, 읽고 나면 마음에 무언가 남는 그런 글들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김밥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엄마는 일평생 김밥 집을 전전하면서 김밥 마는 일을 했다. 나는 좋게 말해 엄마를 주방장이라고 불렀다. 김밥 만드는 주방장. 하지만 좋게 말한 것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엄마는 중년여자가 할 수 있는 그나마 고 임금의 선택지 중 하나인 식당일을 고른 것뿐이다. 대신 무지막지한 고 노동. 임금은 남성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저 임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그놈의 남동생의 학비를 대느라 배움에서 밀려났기에 늘 저 임금 고 노동을 택해야만 했다.

남자만 배움의 기회가 있었던 사회에서 자란 중년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의 선택지는 중년 남성과 사뭇 다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경험은 반드시 여성이어야만 정확하게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태어날 때 염색체가 XX가 아닌 이상 어렴풋이 알아차리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부여 받은 불공평이자 사회적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서사를 단박에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다. 여성의 선택지가 더 적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나 역시 탐탁지 않았고, 엄마도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엄마는 나를 위해 일한다는 말을 툭하면 내뱉었다. 너만큼은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그 바람은 이루어졌으나 나는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한 때는 정규직으로 일했으나 어쩌다보니 계약직으로 밀려왔다. 계약직으로 와보니 계약직의 세계도 종류가 참으로 다양했다. 시간제 계약직, 전일제 계약직, 무기 계약직, 기간제 계약직 등. 계약직들을 잘게 쪼개서 기계 부품처럼 사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계약직 역시 여성이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면 같은 계약직인데 남성과 임금이 확연히 차이가 나거나.

이러한 불공평에 대한 생각의 기원은 아주 어릴 때로 흘러가야만 한다. 아빠는 내가 유치원 때부터 생각 없이 내뱉곤 했다. ‘너는 여자다움이 없어’ 라든지 ‘네가 우리 집 장남 노릇을 해야 된다’ 와 같은 말들. 전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놈의 여자다움은 무엇이며 내가 왜 여자다워야 하는지? 또한 분명히 난 우리 집의 첫째 딸이었다. 그런데 굳이 ‘장남 노릇’을 붙이는 게 너무 이상했다.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첫째는 남자여야만 한다는 뜻인가? 내가 엄연히 첫째지만 여자라서 나로는 안 된다는 걸까?

나로는 안 되는 건지에 대한 질문은 살아오면서 수 없이 던진 질문이다. 내가 여자여서. 내가 내성적이어서. 내가 적극적이지 못해서. 내가 불만이 많아서. 내가 어딘가 삐뚤어져서. 내가 우울해서. 내가 나로서 당당하게 서지 못할 이유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작아져갔다.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진짜 나의 모습을 빼냈다. 그리고 가짜로 꾸며진 모습을 잔뜩 넣어서 새로운 바람을 불었다. 말 잘 듣고, 때로는 장남인척도 해주고, 불만 따위는 숨기고, 세상에 궁금한 것들을 모두 소거하고, 울적하지 않고 기쁘고 쾌활한 사람으로. 대충 먹혀들어갔다. 아니 잘 먹혔다. 내가 긍정적이고 쾌활하고 거기에 유머까지 겸비한 사람인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병들어갔다.

얼마 전 만난 대학 동기들 모임에서 어떤 말끝에 돌아왔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역시 너는 항상 재밌고 유쾌했으니까. 여전 하구나’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울고 싶어졌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분명 새로이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의 모습으로 친구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풍선을 터트리고 싶었는데, 이미 쌓아올린 나의 세계도 같이 터진다는 뜻이어서 너무 무서웠다. 김밥 말 듯 차곡차곡 이미 많이도 말아서 사람들에게 먹어보라고 여기저기 나눠 줬는데 이제 와서 나는 사실 참치 묵은지 김밥이 싫어 둘 다 빼버릴 거야 하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여담이지만 참치 묵은지 김밥은 최고의 김밥이다.)

그러나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향기엔 변함이 없듯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더라도 여전히 나는 나의 주체성을 갖는다. 주체성은 고유한 맛과 같아서 무엇이 더 들어있다고 뽐내는 장기자랑이 아니다. 나는 담백한 맛에 매콤 쌉싸름한 맛까지 겸비했어! 가 아닌 나는 담백한 맛을 가지고 있어 그걸로 충분해. 와 가깝다. 갑자기 참치 묵은지 김밥에서 일반김밥으로 바뀐다 한들 여전히 김밥은 김밥이다. 나는 언제나 여전히 내가 될 수 있다.

아픔도 나의 것, 실수도 나의 것. 그리고 가장 나다울 때에 우리는 강해질 수 있다. 강한 사람은 아프지 않거나 실수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아프거나 실수해도 아픔과 실수마저 용인해주는 사람이다. 인생이 늘 두 가지의 연속이었다. 아프거나 실수하거나. 행복은 잠깐 왔다가는 바람처럼 늘 사라지는데 이상하리만큼 아픔과 실수는 오래 지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이건 진짜 내가 아니라며 부정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다 보면 더 멋진 내가 있을 테니까 하며 이건 가짜라고 단정 짓자 아픔과 실수가 멀어져갔다. 그런데 멀어져 갔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결국 진짜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무너지는 나날들로 찾아왔다. 아파도 실수해도 그것조차 나라며 스스로도 인정해주지 않으니 진짜 자아가 무너진 것이다. 옆구리 터진 김밥도 김밥이고, 시금치 없는 김밥도 김밥이고, 때로는 밥 대신 계란만 넣은 김밥도 김밥이다. 모두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하여 외치는 것이다. 나는 사실 어묵이 잔뜩 들은 어묵김밥이었어 담백한 맛이 일품이지 자극적인 입맛을 기대하지 말아줘!

진정한 내가 되는 방법 : 실수까지 인정해주세요. 그것도 결국엔 나입니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잘하고 언젠가는 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