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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도 Nov 24. 2021

[새벽 산책] 5. 변화

01. 며칠 전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두려운 순간은, 지나친 자기혐오나 자기애착이 나를 삼키는 순간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을 때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사랑하거나 미워하지도 않고 소위 제3자적 관점에서 연민이나 쏟아붇는 그런 상태 말이야."

당시 나는 이미 실감하고 있었다 - 내가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그 '순간'이 오고 있음을.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빈 껍데기, 나를 포장해오던 수많은 숫자와 수식어들임을 깨달은 직후였다.


02. 지금껏 그토록 회색을 찬미했던 이유는, 우울을 단순한 소잿거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향유하고 느끼며 사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무지갯빛 혹은 원색의 맛을 한 번 느껴보니 그러한 나의 태도가 거짓임을 깨달았다. 지금껏 회색은 나의 방어기제에 불과했다 - 정말로 회색 빛의 의미를 진정으로 좋아했기에 회색을 찬미한 것이 아니라, '색'을 가진 자들을 시기했기에 색이 없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 마침 꺼내든 카드가 회색이었거든.


03. 멜랑콜리를 소재로 썼던 글들 중에서 한창 나의 아이덴티티라고 자부하고, 나름 큰 애정을 쏟아부었던 글이 하나 있다. 언제 한 번 그 글을 세상 밖에 내놓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생겨, 탈고를 위해 밀랍된 우울을 하나 프린트해보았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멜랑콜리가 주류에서 배척당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객관화된 우울은 이렇게나 징그럽구나.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에서 나는 것인지 나에게서 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글 위에 펜촉을 옮기는 대신 그저 쓰다듬고, 미련 없이 찢어버린 다음 휴지통 속에 가뿐히 던져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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