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않았지만, 지쳐 있고 피곤한 현대인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한 일주일이었다. 이번 주는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심각한 위기였다. 평생 깊은 잠을 자 본 적 없는 몸이라 매일 9시간을 수면에 투자해야 하는데, 평균적으로 7시간을 잤고 어떤 때는 5~6시간만 자고도 커피 한 잔 없이 하루를 버텼다. 낮잠이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마치 온 우주가 허락해주지 않는 듯했다. 눈꺼풀을 닫을 시간의 여유도, 정신의 여유도 없다. 두통과 스트레스 중 어느 쪽이 먼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을까?
껍데기는 잠을 자지 않는다. 못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어 있는 동안 사경을 헤매며 카페인을 찾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일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는 상태지만, 집중력이 온전하지 않아 초점이 흐릿하다. 이렇게 감각이 무뎌지면 그 어떤 고통이나 고백이 발생하지 않는다. 무감각이 중력과 원근법을 무시해 몸은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눈에 보이는 현실은 뒤틀린다. 그리하여 예상대로, 무언가를 올바르게 이끌어보려 했으나 처참히 실패했다. 세상이 어떻고, 사람들이 어떻고, 남의 글이 어떻고, 내 글이 어떻고 떠들 수가 없다. 혼란을 글로 쓰기 위해 확장하는 과정에서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의는 모든 것을 끝낸다. 고통과 혼란을 끝낸다는 이점이 있지만, 동시에 감정도 끝낸다. 그래서 객관적인 언어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자기 자신과 내용 사이의 거리를 벌리며 생각을 오염시킨다. 바로 그때 현실을 머리로 이해하려다 실패하면 과한 감정이 끼어들거나 전혀 상관없는 환상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다 없애든지 아니면 더 난잡해지든지, 둘 중 하나다. ‘적절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처음부터 거창해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우리는 영원히 사소하고 쓸모없는 영역에 발목 잡힌 채 살아가야 한다.
산문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내용 전체를 기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기발하다 싶은 몇몇 문장들을 제외하면 세세한 주장이나 구성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쉽고 빠르게 써낸 글이 불러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별다른 감정 없이 반복한 수많은 선택과 판단을 중요하지 않은 사건으로 치부해 그냥 흘려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문제는 모든 행동이 거의 다 이런 식이라는 거다. 껍데기는 자기 안에 무언가를 저장하지도 못하고 한없이 가벼워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얇은 몸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실체가 있다는 이유로 이런 삶이 옳은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나 매번 모든 기억을 파헤치고 끄집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대신 다른 답이 있다면, 그건 책 속 한 구절처럼 흔들리지 않기 위해 잊지 않고 계속 반복할 수 있는 가장 간결한 충격이다.
과거 어느 날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1시간 내내 떠들었을 때 나왔던 주제 중 하나는 ‘시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나에게 처음으로 시집을 선물해 준 그 친구는 추상적인 감각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다가 최근 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내 말에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난 정확함과 명쾌함으로 무장한 사람은 시적일 수는 있어도 시가 될 수는 없다는 의심스러운 첫인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시의 언어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서 단번에 이해하고 활용하기에 벅차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긴 시간을 두고 깊게 탐구하기에는 불면증도 수면 부족도 아닌 애매하고 기운 없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시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에 답하기를 미루다가 마감에 쫓겨 급하게 찾아간 낯선 동네의 도서관에서 전에 글을 통해 대면했었던 수전 손택을 다시 만났다. 그녀는 자신의 미학과 예술 철학을 담은 책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형식이 내용에 비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쓸모없게 여겨지는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흔히 내부 문제라고 생각했던 소재나 주제는 사실 외부 문제고 스타일이 곧 영혼이라는 점을 짚으면서 우리의 겉모양새가 우리의 존재 방식이고, 따라서 가면이 곧 얼굴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몇몇 예술 작품들이 한심하고 따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용이 빈약해서가 아니라 ‘스타일’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난 뒤 버스를 타고 걸어서 집에 오기까지 내내 읊조린 말은 “다 감정이야.”였다. 우리가 예술을 접할 때 기대하고 바라는 내용은 아무리 세심하고 철저하게 분류해도 전부 감정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감정을 만들고 다루고 뭉개고 던져주길 원한다. 특히 어떤 특별한 스타일을 통해 잘 만들어진 결과물을 원한다. 좋은 경험의 향방은 예술가가 감정을 보여주는 방식에 달려 있다. 난 계속 걸어가면서 주변에 사람이 없고 혼잣말이 이상하게 들릴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던 구간마다 조금 더 크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서 이 문장을 쓰며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내뱉었다. “다 감정이야.”
최근 대다수 사람들에게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정확한 의미에서 그것들은 감정보다는 반응이나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방아쇠는 분명 외부에 있었을 것이다. 안에서 고뇌하는 자아를 눈치채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채 방어적인 자세만 취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방어적인 자세를 자멸이나 돌연한 공격성의 모습으로 목격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희생자가 발생하고 나서야(떠들썩해서 관심이 쏠릴 때에야) 뒤늦게, 혹은 급하게 애도와 추모로 반응을 대신한다. 외부 자극에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흘러온 역사가 우리를 무감각한 껍데기로 만들었다. 원인은 현대인의 고질병인 불면증도 수면 부족도 아닌 감정의 결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