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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Oct 16. 2023

인간이든지 기계이든지 둘 중 하나

부끄럽지만 이번 주는 20대 후반에서야 인생 첫 아르바이트로 물류센터에 갔다. 아주 오랫동안 맡아본 적 없었던 새벽 공기가 짙게 깔린 길거리는 즐거웠다. 해가 뜨기 직전의 파란색이 하루종일 지속되길 바랄 정도였다. 모두 잠든 시간에 일어나 내 손으로 정당하게 돈을 번다는 의식이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미화시켰다. 피곤한 상태로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이 바로 곯아떨어졌던 1시간 30분 동안 난 빠른 심장 박동 때문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큰 물류센터의 가장 마지막 동에서 버스가 멈췄다. 난 제3 사무실로 들어가 사물함에 짐을 넣었다. 여기서는 개인의 상황과 숙련도를 고려해 업무에 배치된다. 그리고 작업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신원이 초기화된다. 이름과 나이, 주소도 버스 안에서 근로계약서를 쓸 때까지만 유효했다(단 하나 살아남은 게 있다면 성별이었다). 9시 정각에 맞춰 모였을 때, 출처를 알 수 없는 분뇨 냄새가 활짝 열린 창문을 타고 안으로 들어왔다. 쉬는 시간에 사무실의 작은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엿본 결과, 냄새의 발원지는 맞은편에 있는 축사인 듯했다. 그런가 하면 자연의 발효 현상이 만든 냄새에 반해 작업장 안에서는 화학적인 섬유탈취제 냄새가 진동했다. 같은 냄새를 맡고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끼리 동지애 비슷한 것을 느꼈다. 왜 혁명이 주로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오전에 가장 처음으로 했던 작업은 박스 접기였다. 먼저 바닥 쪽을 접어놓고 위쪽은 열어둔 채 양쪽 날개를 접은 박스를 8개씩 쌓아 한 줄을 만들고 팔레트 위에 옮겨놓으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다. 속도에 중점을 두었다가 허술한 이음새 때문에 한 줄로 쌓은 박스들을 들고 옮기는 과정에서 몇 번 무너지고 나서부터는 조금 더 세심하게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관리자 아래의 또 다른 관리자 역할로 추정되는 어떤 사람이 소리쳤다.


저쪽은 빠른데 여긴 왜 이렇게 느려?


이 말은 그날 하루를 통째로 지배했다. 양옆과 뒤에서 딱 세 차례 반복된 목소리는 불량품 검수를 위해 섬유탈취제를 박스에서 꺼내 벨트 위에 올려놓는 작업을 할 때도, 무거운 박스의 넓은 면 양쪽에 바코드 스티커를 붙이는 작업을 할 때도, 칼로 비닐 포장을 뜯어 물건을 넘겨주는 작업을 할 때도 맴돌았다. 나는 아주 손쉽게 세뇌당했고, 오로지 혼나지 않기 위해서만 일했다. 성실한 척, 일 잘하는 척, 완벽히 이해한 척하는 연기력만 늘었다. 게으르지 않고 손이 느리지 않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내 인생 최고의 민첩함을 발휘했다. 이 생태계에서 느린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어 보인다.


어느 정도 예열이 끝난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컨베이어 벨트와 소통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각자 맡은 일에 맞게 자리를 잡고 서 있으면 벨트가 돌아가는데, 이때 과정이 지체되거나 꼬이지 않도록 옆자리 동료들과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 그러니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라고 해서 서비스직과 다르게 인간관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작은 유머가 간절해진다. 어딘가에서 지게차가 계속 새롭게 실어다 주는 섬유탈취제를 한 손에 두 개씩 잡고 벨트 위에 간격 맞춰 펼쳐놓는 일만 반복하다 보니 상품의 라벨이 점점 지겨워지고, 하는 일만 보면 마치 기계 같지만 오랫동안 한 자세로 서 있으면서 골반과 무릎이 삐그덕거린다. 그렇게 자잘하고 사소한 고비를 견디며 아무런 생각 없이 작업을 이어나가는 동안에 어떤 장면이 겹치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때, 다음 날이 시험이라며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어떤 대학생과 차장으로 불리는 사람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친근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약간의 정과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함이 공존하는 이곳이 사람 사는 곳인지 아니면 야생의 정글인지 헷갈렸다.


그날 현장에서 나는 그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일이 서툴고 규칙도 잘 모르니 민폐가 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모두 다 같은 아르바이트생들이고 시급도 똑같은데 과연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 다행히 초심자의 행운이 발동했다. 제품 뒷면에 라벨 스티커를 붙이는 정교한 작업에 비하면 비교적 쉬운 일을 했던 것도 그렇고, 맞은편에서 나와 같은 일을 하던 사람보다 잔소리를 덜 들었던 것도 그렇다. 그 사람은 이미 이곳에서 여러 번 일한 적이 있는 듯했는데, 묘하게 기운 없는 표정과 행동 때문에 나보다 더 많이 혼났다. 그렇다. 내가 적당히 묻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발전이 없으면 다음에 또 일을 나간다고 해서 그날처럼 봐주는 게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장갑 없이 맨손으로 플라스틱 용기를 옮기다 보니 날카로운 모서리에 피부가 베이고 까지면서 아주 조금 피가 났다. 일할 땐 정신이 없어서 몰랐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그제야 따가움을 느끼고는 왼쪽 엄지손가락에 대충 반창고를 붙인 뒤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피가 뚝뚝 떨어져 상품에 지저분하게 묻지 않는 이상, 상처가 나도 반창고를 붙여선 안 된다. 어차피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밀려서 상처 부위를 제대로 덮지도 못한다. 게다가 떨어져 가는 반창고를 조심스레 벗길 틈도 없이 바쁘다. 그땐 팔과 어깨가 딱딱하게 뭉쳐도 조금이나마 편한 자세를 찾으려는 시도를 할 수 없다. 속도를 맞추려면 한번 몸에 익은 자세 그대로 끝까지 갈 수밖에 없고,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건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뿐이다. 그만큼 돌아가는 속도는 무지막지하게 빠른데, 변화는 더디다. 그럴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도 되고, 이익 창출이 유일한 목적인 집단에게는 변화가 께름칙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돈을 부풀리기 위해서는 있는 대로 끌어모으고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데, 그러면 아무리 효율과 윤리가 중요하다고 해도 새로운 시도에 배타적이다.


작업 종료 시간이 다가오자 드디어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는 단순노동을 끝내고 힘쓰는 일로 넘어갔다. 난 컨베이어 벨트에서 벗어나면서부터 흥분하기 시작해 반복적이지 않고 강한 근력을 요구하는 육체노동이 주는 폭발적인 희열을 느꼈다. 보통 여자들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까지 쌓여 있는 박스의 앞뒷면에 바코드 스티커를 붙이는 일을 하게 됐는데, 여자들은 대부분 무거운 박스를 돌릴 힘이 없었고 남자들은 박스들을 옮기느라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난 여자들이 스티커를 편하게 붙일 수 있도록 박스를 돌리고 양면에 스티커가 다 붙은 박스를 남자들에게 넘겨주며 나름대로 그 중간 역할을 자처했다.


여기서 내가 일머리가 좋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책임감이 지나쳤다. 이미 충분히 정신없는 공간에서 일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끼리 동선이 막 꼬이는데도 욕심을 부렸고,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다른 사람이 할 일을 뺏어가거나 방해했다. 일당은 모두에게 똑같이 책정되어 있었고, 난 관리자 직책도 아니며,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인센티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을 하게 될 것이 뻔한데도. 나처럼 지나치게 의욕적인 일일 아르바이트생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깊은 산속에서는 시키는 일만 착실히 잘하고, 커터칼을 잘 챙겨 오고, 수도 없이 오가는 지게차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고, 산업재해라는 불상사만 피하면 된다. 혼자 튀는 부품은 기계를 망가뜨릴 위험이 있다.


사람의 손에 의지하는 물류센터에서는 능력주의가 가장 직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일당 95,000원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한다. 노동력 중 일부는 보상받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어진다. 나 같은 경우에는 반장이 칼로 비닐 포장을 뜯어 물건을 넘겨주는 작업에 투입할 사람을 고를 때 간택받았던 그 순간의 짜릿함으로 대신 받았던 걸까? 한편 그런 인정 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하루 단위로 일하니 어쨌든 잘릴 일은 없다. 그러면서 일당에도 변동이 없다면 열심히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만약 순수하게 돈만이 목적이라면 사명감이나 직업의식은 에너지 낭비인 걸까? 이미 이곳 일에 능숙한 사람들은 관리자가 전부 점검할 수 없는 구역에서 각자 암묵적으로 그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책임감이 배제된 마냥 기계적인 행위일까?


하루종일 부품으로 살면서 시간 개념이 점점 퇴화하더니, 버스에 올라타기 직전 눈에 띈 노을을 바라보고 나서야 갑자기 인간이 되었다. 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빛은 금세 사라졌지만, 곧 출근할 때의 새벽하늘과 퇴근할 때의 밤하늘이 같은 색이 되어서 체감상으로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상하게 배고픔도 피곤함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똑같은 버스 의자에서 이번엔 아침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잠들 수 없었다. 성공과 야망, 지배에 관한 이야기는 기본적인 욕구처럼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언제나 나를 자극한다. 그러나 그 가치가 공허한 만큼 허탈함과 무력감을 남기기도 한다. 욕심이 개입하면 늘 그런 결말을 맞는다. 만약 그곳에 또 간다면, 그땐 정말 완벽한 기계의 태도와 자세를 장착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몸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견딜 방법은 무엇일까? 애초에 그런 근육을 기를 수 있나?


그날은 힘들거나 속상하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그 후 며칠이 지나도 몸 상태는 너무나 괜찮았다. 찬물만 닿아도 따갑던 손의 상처들은 다음 날부터 비누로 벅벅 문질러도 멀쩡할 정도로 금방 아물었다. 아마 내가 목격한 건 현대 산업 사회의 가장 순한 단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비하면 매연 냄새나는 길거리는 참 온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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