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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Oct 23. 2023

날이 서 있는 것도 가끔 지겹다

여행 첫날, 봉화의 한 고택에서 거미를 죽였다. 워낙 가냘픈 생명이라 세 번을 놓치고 네 번째 시도 끝에 휴지 안에 가둬 압사시켰다. 너무 세게 힘을 주어 몸통과 여덟 개의 다리가 전부 분리되었지만, 난 별다른 죄책감 없이 사체와 사체를 싼 펄프 조각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는 몸도 피곤하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불을 끄고 일찍 이불 위에 누웠다. 그러다 까만 눈꺼풀 속 세상에 시인 백석이 나타나 자신의 시를 읊었다.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후략)

- 백석, <수라(修羅)> 중


섬뜩한 문장이 그런 매정함으로 무슨 문학을 하겠냐고 가슴팍에 비수를 꽂으려 시공간을 초월해 쫓아왔다.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였지만, 더 이상 눈앞에 새로운 거미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줄을 치면서 내려와 잠든 나의 코나 입, 귀에 들어올 일은 없겠다며 안심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좀 전의 살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어 굴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방에 딸린 마루로 나가 시를 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등은 뜨겁고 뺨은 차가워서 금방 잠들 수 없었다. 고택을 숙박용으로 개조해 온돌이 아닌 온수 보일러로 난방하는 방식이었는데도 이불 밖이 너무 추웠다. 도톰한 이불 덕분에 잠자리가 편안해도 정신을 차리라는 식의 훈계를 밤새 들어야 했다. 게다가 새벽 4시에는 닭이 울었고, 오는 길에 산 빵을 시원하게 보관하려고 문밖에 내놨다가 고양이한테 뺏길 뻔했다. 난 짜증이 기본값이고 불만을 끊임없이 생산하기 때문에 바로 앞까지 침범해 오는 자연의 예고 없는 자극들이 낯설고 불쾌했다. 날 선 신경을 잠재운 뒤 다시 눈을 감자 이번에는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가 내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10월 중순의 산 중턱에 갑자기 때아닌 겨울이 찾아왔다. 전날 계획에 따라 방에 딸린 마루에서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려던 독립탄원서의 초안과 1000여 편의 시를 썼던 분들의 시점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사방에서 밀려드는 찬 기운 때문에 삼면에 난 문을 열 수 없었다. 입김이 나오고 손발이 얼어버릴 것 같아 마루에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몇 분 동안 잠깐 앉아 있다가 다음 일정 때문에 급하게 숙소를 떠났다. 더 오래 앉아 있었더라도 뇌를 마비시키는 추위에 시 대신 비평문 한 편이 나왔을 것이다.


날이 서 있는 것도 가끔 지겹다. 에너지를 온통 그런 곳에 쓸 수는 없다며 반항한다. 그런 이유로 이른 아침부터 여행의 본 목적이었던 영주 부석사로 이동해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처럼 아름다움 그 자체에 빠져들고 싶었다. 가장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방해 없이 예술 앞에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무량수전에 도달하기 직전에 머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 채 남은 계단을 오르면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기둥이 보인다. 5년 전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봤던 기둥과 겹치는 모습 앞에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었다. 그곳을 등지고 반대편을 바라보면 수묵화의 피사체로 딱 알맞은 첩첩산중이 있다. 거기서 난 책에서 봤던 표지와 비슷한 사진을 찍었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 속에 갇힌 비현실을 즐길 시간은 많지 않았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역사적인 조형미도 그 자체로는 마음속에 무언가를 일으키지 못했다. 정치를 배제한 예술, 오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예술은 스스로 도덕을 품고 있어도 그 의미가 경계를 뚫고 작품 밖으로 퍼지지 않는다. 차라리 내려오는 길에 맞은 진눈깨비가 더 극적이었다. 전날과 확연히 다른 추위는 습기 때문에 더욱 잔인해져 비를 눈으로 바꿨다. 생각지도 못하게 10월에 첫눈을 맞고는 안정적인 시각 효과가 주는 아름다움을 볼 때까지 잠잠했던 어떤 의식이 깨어남을 느꼈다.


우리는 저항과 해방의 단계를 이미 건너뛰었다. 그러나 변화를 바라고 시도하는 정체성은 별다른 공감을 사지 못한다. 누군가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며 불안해하는데, 정작 세상은 정체되어 있다. 내용과 형식이 모두 매너리즘을 겪고 있다. 약진하는 듯한 기분만 중요하고, 실제 목적과 족적은 어디에도 없다. 혁명조차 낭만이 되어버렸다. 고통은 다양해져서 개인적인 고민쯤으로 치부되고, 모두가 공감할 공통된 문제의식은 부재한 채 각자의 윤리만 중요해졌다. 다양성이 허용한 건 개인플레이인가?


“해야 한다”보다 “할 수 있다”와 “하면 멋있다”로 문구를 바꿔 홍보해야만 먹힌다. 목표를 이루려면 대중을 어르고 달래야 한다. 그런 지구의 땅바닥 위에 도톰한 이불을 깔고 곤히 잠든 나의 비판 의식도 세상만큼이나 굳어가고, 일상과 생각이 충격 없이 그저 예상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내 머리는 아직 차갑다. 여행하는 내내 날이 서 있는 정신이 대체 무슨 이유로 존재해서 자아와 주변을 괴롭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매사를 짜증과 불만으로 덧씌우며 그 어떤 기분 좋은 풍경이나 활동에도 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계속 져가는 태양을 앞에 두고 달렸다. 환한 대낮에 비하면 훨씬 세력이 약해졌으나 여전히 각막 깊이 파고드는 자외선을 보며 몸이 녹아내렸는데도 정신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분노할 수 있는 이유는 다들 약이나 술에 취해 있는 가운데 혼자 제정신이기 때문이다. 날이 서 있는 것이 가끔 지겨워도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 나는 모든 개인을 민주 시민으로 간주하고 있다. 기존 질서와 제도에 문제의식을 품게 하려는 본능이 발동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책임과 대응으로 해결을 보라는 결론은 끔찍하다. 그것은 누군가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을 친히 실현하고 갖다바치는 행위다.


한 걸음 나아가 남이 긍정하는 바를 내가 긍정해서 남의 위치를 침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부정할 바를 부정한다는 것은 마치 남이 향락할 바를 내가 향락해서 충돌이 생기고 질투가 생기는 것보다는 다른 어떤 사람도 분배를 요구치 않는 고민을 내 혼자 무한히 고민한다는 것과 같이 적어도 오늘의 나에게 그보다 더 큰 향락이 없을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 이육사, <질투의 반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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