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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Nov 06. 2023

낙원은 해피 엔딩이 아니다

<치킨 런>과 <트루먼쇼>를 동시에 본다면?

여럿이 모이면 어떤 영화를 보게 될까? 모두의 취향을 아우르는 동시에 이야기의 호흡이 끊이지 않아 어색한 정적이 발생하지 않을 명작이 있을까? 수많은 후보군이 제시되었지만 누구도 쉽게 선택할 수 없었고, 결국 그날은 몇몇 구성원들이 인생 영화로 꼽은 <치킨 런>(2000)과 <트루먼쇼>(1998)가 상영되었다. 과거에 이미 경험한 자와 결말이 가져다줄 메시지의 영향력을 예측한 자의 선택이 기준이 된 것이다.


두 영화는 모두 ‘탈출’이라는 결말을 보여주면서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치킨 런>의 닭들은 낙원‘으로’ 탈출하는 반면, <트루먼쇼>의 트루먼은 낙원‘에서’ 탈출한다. <치킨 런>은 너무나 명백해서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에 집중한다. 가끔 이런저런 시련과 방해 공작에 지치긴 해도 사람들을 일깨울 수 있는 누군가가 목표를 잊지 않는다면 언제든 공동체를 한뜻으로 모을 수 있다. 그리고 닭들과 트위디 부부의 생활 영역은 나뉘어 있어서 적과 아군의 구분이 확실하다. 하지만 트루먼은 배우들과 세트장(트루먼의 인생까지 포함한다)을 전부 공유하고 있어서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조차 적인지 아군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때문에 유아기 때 봤던 <치킨 런>의 이야기대로 성인이 된 후에 세상과 싸우려고 하면 한계를 맛볼 것이다. 어쨌든 어린 시절보다 조금이라도 더 사회화된 상태에서는 맞설 대상을 올바르게 짚을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서 여러 문제들을 혼자 해결할 수 있게 되면 시점이 단순해져 일종의 권태가 찾아온다. 그래서 <트루먼쇼>를 보는 시청자들처럼 다른 이의 시선을 훔치고 싶어진다. 그 시선 권력은 남이 쥐어준 것인데도 마치 그 힘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우월감을 즐긴다. 하지만 그것은 트루먼을 더욱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권력자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셈이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트루먼의 삶을 응원한다고 해도 화면에서 떼지 못하는 두 눈은 트루먼의 사생활을 소름 끼치도록 집요하게 쫓는 카메라 렌즈와 차이가 없다.


그런데 더 충격적이었던 건 비현실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달이 사실은 제작진이 일하는 스튜디오였다는 것이다. 쇼의 연출자인 크리스토퍼가 직접 말을 걸기 전까지 트루먼은 태어났을 때부터 봐온 모습이라 의심할 생각조차 못했을 테지만, 모든 세계관을 한눈에 담고 있는 관객들도 영화 후반에 가서야 달이 왜 그런 크기와 밝기로 하루종일 하늘에서 사라지지 않았는지를 뒤늦게 깨닫는다. 권력은 당연한 형상이자 이치처럼 자연에 스며들어 있다. 심지어 아름다워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잠깐 <치킨 런>으로 돌아오면, 문득 낙원이라는 개념에 의문이 생긴다. 닭들이 자연을 거스르고 기계의 힘을 받아 도달한 ‘닭 보호구역’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섬이다. 그 지리적 특성은 혼자 힘으로 날 수 없는 닭들에게 또 다른 울타리 아닌가? 결국 농장에서 탈출할 때 탔던 비행기의 날개에 평생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 아닌가? 트루먼의 고향 ‘씨헤이븐’도 평화로운 테마파크지만, 묘하게 생활감이 없어 보이고 행복 외에 다른 어떤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이 느끼도록 허용된 감정은 딱 거기까지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거나 혼란을 일으킨 인물들은 강제로 끌려가 세상 밖으로 추방되었다. 낙원에서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낙원은 해피 엔딩이 아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문과 철조망을 넘어 바라는 세계에 도달해야 할까? 우리를 분노하게 하면서 무력감에 빠뜨리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무수히 많은 문과 철조망을 넘어도 통계적으로 확률은 50:50으로 귀결된다. 필연적인 통계의 굴레에 갇히는 뻔하고 답답한 결말이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의 인류보다도 가장 선두에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실제로 진행된 현실 중에서 가장 많은 자유를 얻은 상태다. 하지만 그만큼 선택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 와중에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과거의 선택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이미 획득한 자유를 가지고 물물교환을 할 수도 없다. 결국 해피 엔딩이 아닐 걸 알면서도 이야기를 이어가는 수밖에 없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할 자유’와 ‘하지 않을 자유’까지 모두 주어져서 피곤하고 불안한 정신을 잠재우기 위해 카오스를 아예 무시하는 쪽으로 돌아선다.


안타깝게도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줄 진저나 실비아 같은 극적인 캐릭터가 실제로 곁에 나타날 가능성은 적다. 그 빈자리를 메우려면 낙원의 몰락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고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중성이 행복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게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타인의 실존적 위기와 트라우마를 전시하고 상대적인 행복을 강요하며 우리를 쾌락 산업으로 떠미는 화면에 저항해야 한다.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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