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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Dec 25. 2023

몸의 원활한 가동을 위하여

수치심과 몸의 관계

나는 꿈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 소망에 현실적으로 인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다. 우리는 심리적 현실을 물질적 현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中


지난 몇 주간 외출은 장 보러 갈 때가 전부였다. 유일하게 몸을 움직일 가치가 있는 일은 내 입에 들어올 음식을 직접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식재료가 단 하나도 썩어 버리지 않도록 남김없이 소비할 수 있는 완벽한 일주일 식단을 위해 눈을 뜬 시간에는 음식만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준비했다.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욕구를 충족할 기회가 하루에 최소 세 번 있다는 게 엄청난 축복처럼 느껴졌다. 입이 근질거려도 대략 2시간만 잘 참으면 무언가를 또 먹을 수 있으니 위장은 딱 그만큼의 인내심만 발휘하면 된다.


이 넘치는 영양 제공은 거울 속의 ‘누군가’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고 원대한 계획이다. 작년 이맘때쯤 식욕을 철저히 억제하고 신체적 활동을 에너지가 허락하는 한 최대로 몰아붙여 조금이라도 몸무게를 감량하려 애썼을 때, 가벼운 저혈당이나 저혈압의 증세로 추정되는 편두통과 어지럼증을 달고 살면서도 몸에서 체지방이 빠져나가려면 이 정도 힘든 건 예삿일이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게 바로 살이 빠지는 신호라고 ‘누군가’를 계속 설득했다. 물론 증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강도 높은 운동을 해도 몸무게가 줄어들기는커녕 내 몸을 충분히 지탱해줄 근육이 점점 부족해졌다. 이성보다 신체가 먼저 아우성을 치자 난 나의 착오와 패배를 인정하고 최대한 잘 먹는 쪽으로 휙 돌아섰다.


그러나 난 대식가가 아니다. 딱 평균보다 조금 더  먹는 수준인데, 요즘은 날씨가 추워지고 야외 활동이 줄어들면서 위장이 쪼그라들고 소화 능력이 떨어져 예전만큼 먹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감당할 수 있는 식사량을 넘기면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 이미 숨쉬기가 곤란한 지경인데도 견디기 힘들 때까지 입안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한계를 모르고 달리다가 마치 폐가 짓눌리고 횡격막이 찢어진 것처럼 둘 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게 느껴지면 그 순간 음식에 집착하는 나 자신이 몹시 불쾌해지기 시작한다. 잠자리에 들 때부터 서서히 눈을 뜬 후회와 자책, 자기혐오는 다음 날 아침 체중계 눈금으로 가시화된다.


난 나 자신과의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다. ‘당신이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 그런 몸으로 돌아다니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대중교통이나 공공장소에서 땀이 흐르는 몸과 허벅지를 다른 사람과 닿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들에게 불쾌감을 일으켜 미움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어요.’ 이런 일념은 알량한 아부였다. ‘누군가’는 내게 실망했고, 우리의 사이는 급속도로 멀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 기분은 내 몸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룰 수 없고 남에게 보여주는 내 모습이 어색하다는 의식을 만들어낸다.


호흡과 움직임에 따라 꿀렁대고 출렁거리는 살을 들킬 수밖에 없는 몸은 입을 떼기 전까지 시선이 계속 머무는 곳이다. 특히 많은 체지방이 몰려 있는 가슴과 엉덩이는 유난히 수치스러워서 눈을 뜨면 아무런 특징이 없는 몸이 되길 매일 밤 간절히 빌었다. 하루는 울퉁불퉁 튀어나온 것들을 다 잘라내는 수술을 할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브래지어의 사이즈가 맞지 않아 왼쪽 겨드랑이와 옆구리 사이에 종기가 나서 제거 수술을 받았을 때 생겨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흉터가 떠올랐다. 저주받은 켈로이드 피부는 다른 무엇보다 수술용 칼에 가장 취약한데, 난 두 명의 남자 의사들 사이에서 옆 가슴을 노출해야 했을 때 더 큰 취약성을 느꼈다. 수술대 위에서 내 피부를 쑤시고 들어오는 마취용 주사나 수술용 칼보다 혹시나 수술복이 흘러내려 앞가슴이 보이는 일이 없도록 고정해 놓은 테이프가 더 두려웠다.


다행히 당시에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대학에 입학한 뒤에 갔던 엠티가 문제였다. 난 술자리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른 저녁부터 방에 들어가 잠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금방 깼지만, 최대한 모른 척했다. 대화라고는 내 이름을 알려준 게 전부였던 남자 선배는 캄캄한 방에 혼자 누워 있는 내 이름을 부르며 술 냄새가 아주 강하게 풍기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대답이 없었는데도 선배의 손은 굴하지 않고 수술 흉터가 자리 잡은 부위를 스쳤다. 난 당혹감을 숨기고 막 잠에서 깬 척 자연스럽게 몸을 반대로 돌려 그 손으로부터 빠져나갔다.


더 수치스러운 경험을 알려줄까? 갑자기 시간을 확 거슬러 교복을 입고도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간다. 우량아로 태어나 오랫동안 수영 학원을 다녀서 늘 덩치가 좋았던 나보다 키가 작았던 초등학생 남자아이와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줍음이 많다 못해 넘쳤던 나는 이번에도 역시나 그 남자아이의 존재를 최대한 모른 척했다. 그런데 분명히 뒤쪽 아래에서 핸드폰 카메라의 찰칵 소리가 들렸고 바람 한 점 들 수 없는 실내에서 교복 치마가 살짝 나풀거리는 걸 느꼈지만 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황급히 손을 감추는 소리와 작게 킬킬거리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은데, 그건 환청인지도 모른다. 무슨 얼음땡 놀이를 하는 것처럼 온순하게 굴었던 나 자신을 향한 비난이 만든 환청일 수도 있다.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는 정말 현실에서 쓸모없는 대처법이다. 그걸 학교에서 가르치면 더 쓸모없고, 심지어 폭력적이다. 난 가슴과 엉덩이를 가지고 있고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위로 표적이 되었다. 몸은 성역이자 도구가 되었다. 나는 내 몸이 괴롭다고 해서 칼을 댈 수도 없고 여기엔 남의 손만 들러붙는다. 시선은 덤이다. 남녀공학 중학교에는 계단 아래에서 중앙의 난간이 만든 틈새로 치마 속 여성성의 증거를 엿보는 무리가 있었는데, 가끔 그 더러운 눈들과 마주쳐도 그들은 당당했다. 그들의 행동과 그 장소의 분위기가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난 그 시선을 혐오하는 대신에 치마와 속바지, 더 나아가 치마 속에 감춰진 모든 것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 본질을 생각하면 시선을 대변하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다고 여겼다. 훨씬 어렸을 땐 작은 화면에 큰 세상을 가두는 게 재밌어서 사진 찍기를 좋아했지만, 조금씩 크면서 내가 카메라를 손에 쥐게 된 이유는 다른 이가 카메라를 들기 전에 먼저 가져서 그 시선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그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적이 있었다. 작년 추석에 부모님과 벌초를 하러 갔다가 묘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낯선 산에 가족들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길도 없고 나무가 빽빽한 산에서는 지도를 보거나 서로 통화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인적은 물론 cctv도 없는 곳을 혼자만의 힘으로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은 오히려 정신이 나갈 정도로 기분 좋은 해방감을 줬다. 더러워져도 되는 옷을 입고 실제로 더러워지는 경험은 나체 상태로 야외에 던져지는 쾌감을 비슷하게 흉내 내는 듯했다. 그 쾌감에는 수치심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아주 동물적인 감각으로 내려가는 방향을 찾아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를 밟았더니 수치심이 슬금슬금 돌아왔다. 온몸이 흙투성이에 각종 낫이 든 가방과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도로 위에서 하는 일 없이 일행을 기다려야 했던 젊은 여성은 간혹 지나가는 차들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수치심에 관해 인터넷에 떠도는 해답은 하나같이 자기 노출이다. 그렇다면 난 내 몸에 변화를 주어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살과 피부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난 내 몸을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아니, 틀렸다. 내 모습이 변해도 평가와 대상화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거울 속의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서 15kg을 감량하고 얻어낸 자신감은 일시적이었고, 더 이상 몸무게가 줄지 않자 수치심은 다시 돌아왔다. 의심할 여지없이 오직 몸만이 문제라는 인식은 오히려 날 갉아먹었다. 인간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결국 이 수치심은 내게 주어진 숙명인가 곱씹게 된다. 동시에 자꾸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이 일렁인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의 책 <혐오와 수치심>을 오직 제목만 보고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치심이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유아가 피할 수 없는 나르시시즘적 좌절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원초적 수치심”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성적 기관을 통해 우리 자신이 지닌 불완전성의 고통스러운 측면에 주목하게 되며”, “원초적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이상적인 성적 대상을 원하면서 유아적인 나르시시즘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 언제 어디서 학습했는지 모를 완벽주의가 정신으로도 모자라 내 몸까지 옥죄고 있었던 거다.


한 번도 의식한 적 없었던 감정이 눈앞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아예 기절한 듯 잠들었다. 그리고 푹 자고 일어나서 스스로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나에겐 음식이 주는 포만감이 아니라 꿈속 세상에서 떼어놓지 못한 수치심으로 어떤 이미지를 그릴 수 있게 도와주는 얕고 긴 잠이 필요한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어느 날 두 손에 들기도 힘든 큰 빨래건조대를 겨우 들고 하루종일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수치심에 시달리는 꿈을 꿨는데,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본 내 모습이 수치심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의식에 답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게걸스러운 일상 말고 어지러운 정신세계를 만나는 게 진정한 ‘나’와 만나는 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들은 그날 이후로 더 이상 꿈에 나오지 않았다. 당연하게 내 몸도, 그걸 바라보는 내 시선도, 이 모든 걸 포함한 세상도 변하지 않았다. 여기서 또 한 번 너스바움에 따르면 “잠은 분노를 막기 위한 방어지만, 동시에 자신의 인간적인 부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수치심이 선택한 반작용”이다. 그러니 수면은 해결책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세상으로 도망치는 방식일 뿐이다.


난 나도 모르게 자꾸 엄마 뱃속에서 따뜻한 물에 둘러싸여 외부의 침입을 크게 걱정하지 않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았던 기억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돌아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유년기를 상상하며 다 커버린 몸을 무시한다. 특히 2차 성징을 거치며 유년기와 확연히 달라진 부위들에 자의식을 쏟아 넣는다. 불과 며칠 전 메모장에 무의식이 앞장서 간 길을 의식이 울면서 뒤따라간다고 마치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적어놓은 말도 사실은 퇴행적 본능이 저지른 일을 이성이 고통스럽게 수습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다시 통제하고 자신이 원하는 완벽성을 성취하려면, 자신의 몸이 적당하지 않다는 감정이 생겨 섭식 장애를 낳게 된다”는 말대로 과식도 완벽주의와 퇴행의 또 다른 근거다.


자기중심적인 퇴행은 나르시시즘과 같은 형태로 주변과 세상을 오염시킨다. 트라우마의 원인을 정확히 지목할 수 없을 정도로 원초적인 불쾌함 때문에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무엇을 표적으로 삼을지 모른다. 그 경계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돌연한 위험까지 이중으로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에 너스바움은 “수치심의 도덕적 역할은 나 자신의 관점만 중요한 관점으로 취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면서 수치심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수치심이 있고, 나의 수치심이 유일한 수치심은 아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헤아리고 공감해야 할 감정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모두가 내면에 유아적인 면을 조금씩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공존을 위해 헌신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 사랑받을지보다 누구를 사랑할지에 더 집중할 수 있다.


한편 정신의 불완전함은 신체의 연약함과 잘 결합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몸은 죄가 없음에도 가장 먼저 비난의 대상이 되고 폭력의 과녁이 된다. 또 불쾌한 시선과 손들은 평생 내 주위를 맴돌고, 수치심도 흉터처럼 계속 내 피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수치심은 우리의 정신을 파괴하는데, 정작 수치심을 제공한 주체들은 그 파괴를 직접 목격하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어쩌면 그 파괴를 종용하고 다시 도구처럼 쓸지도 모른다. 그에 대항해 수치심을 느낀 또 다른 주체들은 몸으로 사랑받고 대상화로 만족감을 얻겠다는 생각을 폐기할 수 있다. 상처 입은 몸은 깊게 남은 흉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으니 그 몸의 원활한 가동을 위하여 애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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