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검도부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취업, 출산, 육아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후 칼을 놓은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대학검도연맹전이 가까운 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남편과 함께 동아리 후배들을 응원할 겸 경기장을 찾았다.
경기장에 들어서자 개회식을 위해 줄지어 선 선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경기장 특유의 호구 냄새가 순식간에 나를 동아리 검도부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곧이어 후배들을 찾아 관중석으로 올라가는 길, 낯익은 얼굴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이름은 잊었지만, 내가 검도를 떠나있던 10여 년간 만난 적도, 따로 떠올린 적도 없지만 검도장에 오면 만날 수 있었던 얼굴들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변함없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를 만난 느낌이라고 하면 맞을까.
잠깐만 보고 오려고 했는데, 후배들의 경기가 끝난 뒤에도 경기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 호쾌하게 공격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내 일인 양 흥분하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집 근처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러 갔다가 몇 시간 사이에 과거를 여행하고 현재로 돌아온 것처럼 격세지감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검도를 그만뒀더라?’ 회사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우려니 시간이 없어서였다.
하루 8시간 근무, 점심시간을 포함하면 9시간을 회사에서 지내야 한다. 출퇴근 한 시간씩을 포함하면 11시간이 회사일로 쓰였다. 13시간이 남는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침에 잠든 아이들 옷을 갈아입혀 어린이집으로 실어나르고 밤에 어린이집에서 데려오면 이미 저녁 8시 가까운 시간이 된다. 아이들이 자야 하는 시각은 정해져 있었고 나의 체력도 한계가 있었다. 깨어있는 시간 동안 아이와 보낼 시간이 3시간이 될까말까 한 것이다. 한번 운동을 하면 적어도 3시간은 걸리는 운동까지 주 2~3회 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그런가?’ 생각해보니 여전히 회사를 다니지만 아이들이 내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시간은 지나있었다.
칼을 내려놓은 또 하나의 이유는 사무직의 고질병인 거북목과 목디스크 증상 때문에 목과 어깨가 안 좋아져서 호구를 쓰고 운동하기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런가?’ 생각해보니 최근 3년쯤 걷기와 필라테스를 꾸준히 하면서 공을 들인 덕에 목과 어깨의 고질적인 통증은 없어진 상태였다. 결국 오래 쉬다보니 내가 왜 쉬고 있는지도 잊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다면 검도를 다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답은 Why not? 경기에 출전하는 후배들 응원하러 간 나비의 날갯짓이 불러일으킨 폭풍은 제2의 검도로 이어졌다. 제2의 검도라고 굳이 구분해 부르는 이유는 내가 20대의 몸과 생각으로 시작해서 10여 년간 해왔던 검도와 40대의 끝자락에서 다시 시작하는 검도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이미 운동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아직 어렸던 아이들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참가했던 합동연무에서 만난 일본 중년 여자 검도인의 말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 검도를 하다가 육아, 출산과 함께 그만두었는데 아들이 다 크고 출가하니 이제 여유가 생겨서 다시 검도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제2검도라고 명명했다. 십여년 간 그 말을 떠올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검도를 다시 시작해보면 어떨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자마자 그 단어가 떠올랐건 나에게는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운동 후 술 한잔을 하면서 나에게 상호연습을 할 때 무의미한 동작이 많다고 조언해 주었다. 상대를 압박하고 다가가서 흔들었으면 뭘 해야하는데 압박과 공격이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때는 '뭐래, 나한테 많이 맞았으면서', 라고 생각하고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었는데 다시 검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시점에서는 그 말이 갑자기 영화의 플래시백처럼 차라라락 빠른 속도로 재생되면서 무슨 말인지 수긍이 가는 거였다.
그래서 두 번째 검도를 시작하면서는 원대한 수련 원칙을 세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상대를 흔들었으면 공격을 내자.
안 맞으려고 막는 칼을 쓰지 말자.
약점을 드러내놓고 배우자.
일상의 수련에서는 이기고 잘 하려고 하는 검도보다 연격할 때 큰머리를 제대로 치는 기쁨을 소소하게 누리며 손목, 발목, 무릎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지속 가능한 검도를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