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동안 열심히 엄마와 운동을 하러 다녔던 슈가 개학을 하는 9월부터 운동을 쉬고 10월에 기말고사가 끝나면 다시 다니겠다고 했다.
10월에 시험이라고 9월부터 시험공부를 할 분도 아니니 9월까지는 다녀보자고 설득했다. 엄마가 월수금 주 3회, 하루 세 번씩 운동하는데 너 어차피 그 시간에 핸드폰 보고 놀지 뭐하겠냐고. 그래서 등록을 했는데 운동 한 번 가고 나서, 어느 날은 학교에서 열린 창으로 들이친 빗물을 밟고 미끄러져서 엉치가 아파서 못 가고, 그거 낫고 나니 열이 나서 코로나인가 싶어서 못 가고 열이 나아질 즈음에는 기침 감기가 심해져서 못 갔다. 그렇게 세 번 일이 생기니 3주가 가버렸네? 결국 안되겠다 하고 환불을 받았더니 환불액 4900원. 아 놔.
다음 운동에는 가겠지 가겠지 하면서 기대했는데 우리집에서 제일 덩치 큰 놈이 제일 자주 아파. 이래서 조퇴하고 저래서 학원 빼고, 요래서 과외 미루고 조래서 운동 안 가고. 이걸 보고 있자니 나도 짜증이 차올랐던 거다.
조퇴를 하고 올 정도면 아파서 약 먹고 자는 거 말고는 다른 걸 못 할 상태여야 하는 거 아님? 근데 이 분은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 거여. 아니 그럴거면 학교에서 버텨야지! 그 두 세시간을 못 버티고 집에 와서 누워서 놀아?
나도 아플 때 아픈 걸 잊으려고 동영상 본 경험이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꼰대인가 싶기도 했다가, 애가 아프다는데 '아파도 학교에서 쓰러지라'고 말 할 정도의 독기는 없고, 그러면서도 내가 이렇게 물러서 저 녀석도 물러터지고 안일한 거 아냐? 싶어서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9월 30일, 그런 분위기가 쌓이고 쌓였던 9월의 마지막 운동날.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면서 10시쯤 슈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야?"
"나 공부할 거 해놓고 9시 반에 친구랑 운동하러 왔어."
"운동 30분쯤만 더 하고 집에 가. 가서 엄마랑 하기로 한 집숙제 해서 엄마한테 인증샷 보내."
"알았어."
그렇게 전화를 끊고 집 앞 역에 내려서 슈에게 전화를 했다. 11시가 되도록 집숙제 인증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빨리 해서 보내라고 말하려고. 전화를 안 받는 거다. 집에 가서 11시 반까지 전화를 해도 전화도 안 받고 집에도 안 들어왔다.
최후통첩이다.
"10분 안에 집에 안 들어오면 현관문 안 열릴 줄 알아."
계속 전화를 걸고, 같이 운동했다던 친구 전화번호를 수소문하러 슈의 다른 친구에게 전화하고 쌩쑈를 하고나니 슈녀석이 전화를 걸었다.
"엄마 미안. 집숙제 하려고 한자노트 사러 가다가 문방구 앞에서 친구를 만나서 얘기를 하다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 몰랐어. 11시 넘으면 방해금지 모드가 켜지도록 핸드폰을 설정해 놔서 전화 온 줄 몰랐고."
"그러니까 이 ㅅㄲ야 밤 11시가 넘으면 집에 ㅊ들어와 있어야지. 중학생이 밤 12시가 다 되도록 집에 ㅊ들어오질 않고 ㅈㄹ이야! 아빠가 집에 안 계시니까 엄마가 우습냐? 현관문 잠겼으니까 누나한테 전화해서 열어달라고 하든말든 하고, 앞으로 나한테 말 걸지마 이 ㅅㄲ야!!!!!!!!!!!!!"
성질이 뻗쳐서 통화종료 버튼을 얌전히 누를 수가 없다. 전화기 액정에 주먹질을 하다 침대에 내동댕이치고 안방문을 쾅 닫았다.
누워서 씩씩댄다. 진짜 새벽이슬 맞고 밖에서 버텨보라고 하고 자버리고 싶다. 근데 그런다고 애가 반성을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딸내미가 전화를 받는 기색이 없네? 기다리다 못해 슈 어디있는지 전화해보라고 했더니 그제야 동생에게 전화를 해보는 딸. 집 앞 놀이터에 있다며 문 좀 열어줄 수 있냐고 했단다.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누나가 엄마 몰래 동생을 집에 불러들이고 동생도 누나에게 고마워하면서 들어오는 건데 엄마가 옆구리를 툭툭 찔러줘야 동생한테 전화하는 누나. 방금 엄마한테 혼났으니 누나한테 틱틱대면서 부탁하는 동생. 부탁하는 주제에 말투 왜 띠껍지? 못마땅한 딸. 총체적 난국이다.
게다가 슈 이시키는 나한테 말걸지 말랬다고 또 지 방에 들어가서 누워버리네?
가서 일단 방 정리를 시켰다. 왜 방 정리도 제대로 못하지? 항상 깨끗한 걸 유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침대와 책상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 말고 다른 바닥 영역에는 뭐가 없도록 해놓으라는 게 그렇게 어렵나?(내가 쓰고 있는 방과 책상을 쳐다보며 기둥이가 할 법한 생각이라는 건 지금은 잊기로 해.)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지켜서서 이거저거 치워라. 명령어를 입력하고 슈는 아바타가 된 양 방을 치운다.
방을 치운 후에는 지금부터 엄마 숙제를 해서 톡방에 인증해라. 명령했다.
슈가 훌쩍거리며 숙제를 한다. 나중에 들으니 엄마가 자기한테 이 새끼 저 새끼 하고 처처 거리면서 말해서 속이 상했던 거다.
숙제를 다 한 아이를 안방에 불러들였다.
"앞에서는 알겠다 하겠다 하면서 뒤에서는 그 약속 안 지키려고 머리 굴리고 최선을 다하는 꼬라지가 제일 보기 싫다. 엄마가 이제 50살이 다 되어서 내가 재미있는 일을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게 너한테는 '아싸 자유다. 내 마음대로 놀아제껴야지.'라고 다른 길로 샐 빌미가 되고 있는데 그걸 막으려고 엄마가 이걸 그만둬야 되니?"
"아니요."
"어, 나는 그럴 마음이 없어.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너고 그 선택으로 망하는 것도 너지. 니가 니 24시간을 가지고 알아서 망하러 가는데 내가 내 소중한 24시간을 그걸 막으려고 애쓰는데 쓸 것 같아?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그런다고 막아지지도 않을 뿐더러 검은 머리 짐승이 하겠다고 마음 먹은 걸 뭔 수로 막니? 내가 매번 말하지만 니가 내 밑에서 살 날 이제 길어야 3년이야. 그 안에 뭐라도 꾸준히 하는 습관, 그걸 꾸준히 하면서 달라지는 변화, 그걸 조금이라도 어릴 때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매일 한자 쓰게 하고, 영어 읽고 녹음해서 엄마한테 보내는 그 최소한의 과제라도 꾸준히 해보라는 거야. 중3씩이나 된 애가 꼴랑 하고 있는 이걸로, 이것만 하면 앞날이 창창해지는 필요충분 조건인줄 알아? 니가 예전보다 조금 더 열심히 하는 것 같고 생활이 바쁘고 할 게 많다고 뭐 대단히 열심히 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는데 니 주변에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너 같은 생활 그거보다 더 빡세게 초등학생 때부터 했어. 니 문제는, 너무 좁고 깊은 너만의 우물 속에 갇혀서 내가 이정도 하면 정말 열심히 하는 거지,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데 사실 그건 노력의 ㄴ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거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거라고!!!!!!!!!"
"엄마 그렇게 비교를 하신다고 하면 엄마도 비교대상이 더 많을텐데요. 아니다. 그냥 내가 잘못했어요."
"뭐? 말해. 니 말의 흐름상 다음에 올 말은 엄마도 다른 잘 하는 엄마들에 비교하면 별 대단한 거 없는데요. 저는 엄마를 다른 엄마와 비교 안 하는데 엄마는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정도의 논지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맞아요. 엄마는 일상을 너무 빡빡하게 사는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고. 여유있게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요. 나도 그렇고. 근데 엄마는 하루를 뭘로 가득 채워서 빽빽하게 만들까를 기준으로 생각하잖아요. 좀 여유 있게 살면 안 돼요?"
"글쎄 그게 유튜브 세대의 특징인가? 자기가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다른 사람이 게임 하는 걸 대리만족하면서 구경하는 걸로 충분히 재미있고. 자동차 정비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자동차의 매커니즘을 제대로 공부하지는 않고 정비공이 썰 푸는 거 보면서 자기가 그쪽 공부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자동차 운전을 잘 하고 싶으면서 컨트롤러 들고 그란투리스모 플레이하면서 자기가 레이싱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 그거 다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뭔가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그게 니가 말하는 여유있는 삶인가? 나는 검도 잘 하는 국가대표들 경기 보면서 대리만족하는 것 보다는 그걸 보고 내가 운동해서 내 동작이 거기에 조금이라도 비슷해지는 게 좋은 사람인데? 책 읽는 거 좋아하는데 누구한테 대신 읽어달라 그래? 남이 읽고 서머리 한 거 듣고 읽은 척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은데? 엄마가 너한테 루틴을 강조하는 게 숨이 막힌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사범님이 그러셨어. 매일의 운동은 A4용지 한 장을 밑에 까는 것과 같다고. 하루 힘들게 땀 뻘뻘 흘리며 운동해봐도 나아지는 건 A4용지 한 장의 두께만큼밖에 안 되는 거야. 그런데도 그 종이가 한 장 두 장 쌓이다 100장 200장이 내 발 밑에 깔린다고 생각해봐. 단연 두드러지게 높아지지 않겠어? 밥 먹고 자고 나면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있어야 하루하루를 살고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게 있다고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아무 것도 안 하고 여유 있게 누워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또, 엄마의 문제는 내가 뭔가를 잘못하면 내가 열심히 한 건 하나도 안 봐주고 놀기만 한 걸로 매도한다는 거예요."
"엄마가 너 초등 고학년 때부터 말했잖아. 문제집을 푸는 게 공부가 아니라고. 문제집을 풀어서 채점을 해서 니가 몰랐던 부분을 '아, 여기를 내가 몰랐구나, 혹은 잘못 알았구나' 깨닫고 바로 알게 되는 거, 거기까지 해야 공부라고. 근데 너는 계속 문제집을 풀기만 하고는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걸 잘 했다고, 인정해주라는 거냐고!!!!!!! 나야말로 지겨워 죽겠다. 이제 곧 고등학교 갈 건데 이렇게 해가지고는 진짜 꼴지 못 면한다고!!!!!!!!!!!!!!!!!!!!!"
그리고는 통금을 정했다.
밤 11시까지는 집에 들어와야 한다.
엄마 숙제의 기한도 정했다. (한자 쓰기와 셰도우 리딩 후 녹음파일 전송)
밤 9시까지는 톡방에 인증을 올려야 한다.
밤 12시까지는 매일 기타 주요과목 세 과목의 공부를 채점까지 해서 처음과 끝 페이지의 사진 찍어서 올려야 한다.
이걸 아빠가 올 때까지 계속한다. 하루도 예외는 없다. 못 하면 처음엔 그 주치 용돈(주 11000원)을 안 준다. 반복되면 그 달의 유흥비(월 2만원)를 안 준다. 계속되면 그 계절의 의복비를 안 준다.(계절당 7만원) 그래도 안 고쳐지면 과외와 학원을 차례로 끊는다.
슈는 모든 조건에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엄마 나한테 이 새끼, 저 새끼, 처 접두사 붙여서 말하기, 그거 하지 마세요."
"엄마가 엄마 기분 따라 아무 때나 그래? 술 마시고 꼬장부리니? 엄마는 니가 거짓말 하고 엄마를 속이거나 앞에서는 한다고 하고 뒤에서 딴짓할 때, 선을 넘을 때만 하잖아. 니가 하는 행동이 너를 거짓말쟁이에 못 믿을 놈으로 만들고 있다는 거, 그 인과관계를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니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밖에 안 되는 행동을 했다는 걸 알아야 하니까. 아,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이런 대우를 받는구나, 아직도 그 패턴 파악을 못했어? 행동은 그 따위로 해놓고 나쁜 말은 듣기 싫어? 그런 게 어딨어?"
"그러세요. 그럼."
슈가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훌쩍거리는 소리가 난다. 내가 휘두른 칼에 슈 영혼이 상처받은 소리다. 가서 슈를 안아줬다.
"엄마가 말 못되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그렇게 말 안할게. 많이 상처받았구나. 우리 슈."
안아주는데 순순히 안기는 건 좋은 신호다. 얘기를 더 해봐야겠다.
"친구 누구를 만나서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던 거야?"
"엄마 숙제 하러 한자 노트 사러 갔는데 00이를 만났어. 고등학교 어디 가야되는지 얘기하고 우리같은 성적은 정시로 가야된다고 그래야 인서울 할 수 있다고 그런 얘기 하고 있었는데...흐흑"
"슈야, 정시는 곧 수능 성적으로 대학을 간다는 건데 너처럼 학원에서 선행을 안 한 아이는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걸 열심히 공부하고 이해해서 그걸로 수능을 쳐야 돼. 그러니까 하루 24시간 중에 1/3을 쓰는 학교에서 하는 공부, 그러니까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을 열심히 공부한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야. 누나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도 내신을 잘 받기 힘들어서 인서울을 하네마네 하니까 그럼 나는 내신은 안 되겠네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되는데 누나가 끝까지 열심히 해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잘 봐."
"응."
"엄마가 너 상처주는 말 안 할게. 엄마가 미안해."
슈를 부둥켜 안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딸내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제는 그 난리가 났더니 안아 재우셨네요."
어, 그렇게 됐다. 다시 한번 믿어보는 걸로.
평소엔 녹음 제목이 기침을 못 참겠어, (대학 축제에서 본) 르세라핌 라이브가 영, 뭐 이런 거였는데.
혼나고 나서는 무미건조한 제목. A.
지금 시각이 오후 7시 40분이 다 되었는데 이눔 시키 숙제는 언제 보내려나... 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