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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Oct 17. 2024

검도의 신 가라사대 '너만의 거리'를 알라!

“엄마, 돼지숯불고기 메밀쌈이랑 냉면 시킬 건데 숯불고기 메밀쌈을 1인분만 시키면 될까? 아니면 2인분 시킬까?”

“1인분이 고기 몇 그람인데?”


“200그램이요.”


“그럼 1인분만 시켜도 될 거야. 200그람이면 꽤 많은 거거든.”     


국립수목원에 가보고 싶다시는 엄마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 수목원에 들어가기 전에 들린 식당에서 나눈 대화다. 중국집에 가면 1인 1식사를 시키고 나눠먹을 요리를 하나 시키는 게 국룰인 것처럼 여기서도 숯불메밀쌈을 2인분 시키고 나눠먹을 식사를 하나 시켜야 할 것 같아서 숯불고기를 1인분만 시키자니 좀 부족하려나 싶었는데 엄마의 답은 명쾌했다.     



식사가 나왔을 때도 긴가민가했다. 고기 한 접시와 메밀쌈 여섯장, 곁들여먹을 각종 채소와 절임류를 눈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고기가 좀 적은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막상 먹어보니 기우였다. 둘이서 메밀쌈을 세 장씩 나눠 고기 한 접시를 6등분해서 쌈에 싸보니 꽤나 고기가 많이 들어갔다. 역시 나올 음식의 양과 우리 위장의 용량을 잘 파악하고 있는 엄마는 생활의 달인이었다.      


요즘 무슨 생각을 해도 검도로 이어지는 와중인 나는 이 상황에서 ‘거리’를 떠올렸다. 검도에서는 거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죽도의 어디로나 친다고 득점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검도는 죽도를 들고 상대를 유효한 격자로 타격해야 이기는 종목이다. 검도에서 말하는 유효한 격자란 죽도의 끝인 선혁에서부터 한 뼘 남짓한 지점에 매여있는 중혁까지의 부위로 상대의 머리와 손목, 허리 중 한 곳을 타격하는 것을 말한다. 타격 시에는 발구름과 기합이 동시에 맞아떨어지는 기검체 일치 상태여야 한다.      


너무 먼 거리에서 공격하면 닿지 못하거나 닿더라도 타격이 약해 유효격자에 이르지 못하고 너무 가까이서 치면 칼이 깊어서 유효격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때문에 어느 정도 기본동작을 익힌 후 호구를 쓰고 상대와 칼을 맞대고 운동하게 되면 가장 먼저 듣는 것이 일족일도의 거리라는 말이다.      


일족일도의 거리란 한 발 들어가면 칠 수 있는 거리라는 말이다. 죽도 끝을 서로를 향해 겨눌 때 내 죽도의 끝과 상대 죽도의 끝이 닿아있는 거리에서는 쳐도 성공적으로 타격할 수 없다. 거기서 한 발을 들어가면 상대를 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상대도 나를 칠 수 있는 거리이다. 선혁과 선혁을 맞댄 상태에서 어떻게 한 발을 들어가 공격을 성공시킬 것인가 검도는 그것이 문제인 스포츠인 것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늘 얘기해 주는 것이 내가 칠 수 있는 거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머리를 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거리가 좋은지 어느 거리에서는 칠 수 있고 어느 거리에서는 칠 수 없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이다.      


검도에서 자기의 거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범위를 넓히면 살면서 어느 영역에서나 나를 아는 건 중요하다. 하다못해 뷔페에서 접시에 음식을 떠올 때도 내가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쓸데없이 음식을 남기는 일이 안 생긴다. 귀한 식재료로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을 내가 떠왔는데 너무 배가 불러서 남긴다? 바보 같은 일이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그렇다. 앞으로 남은 시험 기간이 얼마나 되고 내가 문제집 한 단원을 풀고 채점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드는지를 알고 있어야 제대로 준비를 할 수 있다. 사람을 사귈 때도 내가 무엇을 참을 수 있고 무엇은 참을 수 없는지를 아는 게 중요했다.     


그러니 인생을 오래 산 엄마가 알고 있는 ‘나만의 거리감’에 대한 감각을 목격하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약해지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 같이 슬픈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어서. 나에 대해, 정확히 말하면 나의 한계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오직 세월이 주는 지혜일 터여서. 나의 나이듦도 그럴 것 같아서.  

   

앞으로 검도를 하면서는 내가 칠 수 있는 거리를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좁아지고 멀어지는 거리에 맞는 타격을 해낼 수 있는 몸의 능력을 키워봐야지, 메밀쌈을 입안이 미어지도록 가득 넣고 뿌듯하게 씹으면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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