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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Oct 10. 2023

남편의 마법의 주문_2

'사서 잘 쓰면 되지'와 '원래 있던 거야'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swordni/79


원래 있던 거야.


문앞에서 택배 상태로 걸리는 게 아닌 이상은 모두 있던 거였다. 며칠 전 몇 주 전 몇 달전에 우리집에 들어왔든 옷장에 걸 상태로 발견되 모두 있던 거니까.


플레이스테이션 광고 카피 중에 제일 유명한 게 아닐까 싶은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 보다 한 단계 위인 '허락이나 용서보다 원래 있던 거라고 눙치고 넘어가기가 쉽다', 전략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IT제품 덕후들은 불리하다 옷 덕후에 비해.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브랜드를 어찌 그리 잘 아는지 엄청 유명한 브랜드가 망하면서 말도 안되게 싸게 나왔다는 옷들이 차곡차곡 옷장에 쌓여갔다. 내가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의 핑계에 대해 팩트체크를 하지 않고 그의 옷장을 열어보지도 않는 거였다. 신발장 공간의 3/4이 그의 구두고 남은 1/4에 나머지 세 가족의 신발을 다 구겨 넣어도 묻지 않았다. 나에게 사달라고 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그의 마법의 주문에 대항하는 나의 주문은 이거였다.


아유 지겨워.


또 새 옷이 들어왔네 아유 지겨워.

또 새 신발이네. 아유 지겨워.

핸드메이드 코트는 왜 색색깔로 쟁여놨니. 아유 지겨워.

시계가 도대체 몇 개니. 아유 지겨워.


'아유 지겨워' 속에는 많은 말이 담겨있었다. 40대 가장이 어쩌다 생긴 부수입으로 가족 여행을 가자거나 집 대출을 조금이라도 갚자거나 늘 부족한 카드값을 메우라고 내놓는 게 아니라 살뜰하게 자기 입성만 챙기고 있는 게 나만 이상해? 세상 사람들아? 그러면서 나한테 남편 옷 한 번 사준 적 없다고 서운해하면 나는 억장이 무너져 안 무너져.


이 평행선을 그리며 많이 부딪혔다. 나는 남편이 멋지게 차려입고 나가는 것을 고운 시선으로 봐주지 못했고 남편은 내 눈빛에는 항상 비난이 담겨있다고 힘들어했다. 이럴 거면 헤어지는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부부관계가 멀어졌다.


가족에게서 그를 빼자 빈 자리가 드러났다. 그에게서 꼭 고치고 싶었던 그 소비벽을 빼놓고 보면 그는 좋은 아빠, 다정한 남편, 좋은 학자였다. 그는 다른 모든 면에서 좋은 남편이었기 때문에 한 가지만 고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국영수과 중에 수학 빼고는 다 잘하는 학생에게 수학을 왜 이렇게 못하냐고 주눅들게 만들었던 게 아닐까?


생각을 다시 해봤다. 내가 좀 더 잘 벌었으면 이렇게 안달복달 안 했을 수도 있지 않나? 내가 더 벌어보는 방법은 없나? 물론 풀타임 워킹맘인 내가 새로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돈을 더 벌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을 한 번 전환해 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견디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나는 그를 보는 눈빛, 그를 향한 말에서 비난과 불만을 빼고 인정과 수용을 그 자리에 넣었다. 아니 넣으려고 애썼다. 주고 받는 말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내가 보내는 말이 달라지니 그도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관계 회복의 시작이었다.


그런 시간을 거쳐 남편은 두 번째 주문 '원래 있던 거야'를 폐기했다. 엄밀히 말하면 원래 있던 거라는 말은 하지만 더 이상 내 보기에 원래 없던 것이 생기지 않았다. 혹은 아직 나에게 들키지 않았다. 이제는 속옷 같이 꼭 필요한 소모성 아이템에 대해서만 사달라고 한다. 그리고 나도 남편에게 '아유 지겨워' 주문은 어지간해서는 쓰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돈을 쓰고도 늘 만족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나의 오랜 버릇을 버리고 남편의 첫번째 주문 '사서 잘 쓰면 되지.'를 공유하기로 했다.


이왕 쓰는 거면 기분 좋게 '사서 잘 쓰면 되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항공권을 사고도 여행의 설렘 대신 카드비의 압박만 느끼던 내게 '잘 샀어. 지금이 제일 쌀 때야.'라고 토닥여주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이런 큰 소비에 대해서는 남편이 이 말을 해줘야 안심이 된다.


결혼은 18년 전에 했어도 함께 잘 사는 방법에 대해서는 함께 지지고 볶는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버티고 남은 주문이니 소중히 사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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