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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리아 DayLia Nov 15. 2023

임신. 계획만 하면 쉽게 될 줄 알았지.

아이는 하늘이 준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조마조마했던 임신 초기를 지나 중기에 접어든 지금에서야 글을 쓴다.

그동안 일상에 바쁘기도 했고 입덧 때문에 힘들기도 했고. 쉽지 않네, 임신.


2022년 여름. 우리는 결혼 후 준비될 때까지 미뤄왔던 임신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안정되지 않기도 했었고 너무 좁기도 했었고... 여담이지만 남편이 그때를 회자하면 짐이 너무 많아서 복도에 사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사실 인정...) 몇 배나 큰 하우스를 산 뒤 이사를 왔을 때 우리가 산 가구라고는 85인치짜리 거대한 TV, 두 명이서 사는데 나중을 위해 산 10인용 다이닝 테이블, 마사지 체어가 다이니 그의 말이 옳다. 분명히 집이 텅 빈 느낌이어야 하는데 웬 걸. 알맞게 꽉 찬 느낌. 하하.

나의 저장강박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요즘이다. 많은 것들을 버리고 정리하려고 노력하는 중.(물건이 없으면 정리하기가 쉽다. 나중에 이와 관련된 글도 써보겠다.)


본론으로 돌아와, 우리는 첫 시도 만에 성공하였다. 와, 이렇게 쉽게 되는 거였어? 괜히 걱정했잖아!

내 나이, 만으로 34살이었다. 35살부터 노산이라고 여러 가지 검사도 늘어난다던데 잘됐다!

기쁜 마음에 친정에도 바로 알렸다. 내가 미국에 살기에 영상통화이긴 하지만 친정의 반응을 찍기 위해 카메라도 세팅해 놓고 서프라이즈 플롯도 짰다. 남편의 한국어 연습을 위한 거라며 가짜 질문 목록도 만들어 보내고, 가족들 모두가 카메라에 찍히도록 세팅했다.

"2023년 2월에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으로 진급하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남편이 영어로 외쳤고, 남동생은 제일 먼저 알아차렸지만 자신이 들은 내용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반응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다음으로 엄마가 Grandma라는 단어를 인지하시고 환호성을 지르며 엄청 기뻐하셨고 그다음으로 아빠의 덤덤한 반응 + 촉촉한 눈가가 보였다.

의외로 무뚝뚝하던 남동생이 기분이 묘하다며 기뻐하였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고. 자신과 유전적으로 연결된 새로운 생명이 생긴다는 느낌을 생전 처음으로 느껴 봐서 그런지 꽤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 모습 모두 다 녹화가 되었다.

임밍아웃(임신+커밍아웃)도 잘했겠다, 병원에 가서 확인만 하면 되겠구나. 시댁에는 아직 알리지 않기로 했다. 직접 만나서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어차피 10주 차에 우리 집에 집 구경 겸 오실 예정이니 그때 서프라이즈를 해 드리면 되겠구나 싶었다.


임신 상담 겸 5주 차에 이미 산부인과에 예약을 해 놓은 상태여서 들뜬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아기집 확인. 아직 심장 발달 전이라 그냥 임신 사실만 확인하고 왔다.

괜히 몸도 나른한 것 같고 뭔가 먹고 싶은 음식도 많고. 특히 미국에서 구하기 힘든 음식들. 짜장면(한국에서 먹는 것의 세 배 가격). 한국식 딸기크림케이크라든지(미국 일반 베이커리의 케이크는 정말 맛없다). 참고로 난 설탕 알레르기가 있어서 단 걸 잘 안 즐기는데 임신하고 나서 처음으로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으니 신기하긴 했다. 

설탕 알레르기? 믿기 힘들겠지만 나도 남편이랑 결혼 후에 내가 설탕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탕이 조금 들어간 건 괜찮지만 너무 달면(밀크초콜릿이나 설탕쿠키) 목이 따끔따끔해지면서 켁켁거리게 된다. 남편은 이런 사람이 어디 있냐며 구글로 검색해 보더니 결국 내 말을 믿게 되었다. 훗. 자신도 그 알레르기를 갖고 싶다는 남편. 본인은 단 것을 무진장 좋아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알레르기는 아니라서 우리 자식들도 이 알레르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하하. 엄마와 나, 내 남동생이 이 알레르기를 갖게 된 것을 보면 유전학적으로 우성일지도.

6주 차부터 입덧도 시작되었다. 살짝 메슥거리는 정도로 입덧도 거의 없을 정도라고 볼 정도로 안 심했다. 태명도 지었다. 한국어로 베리. 베리(Berry)처럼 귀엽고 Very라는 뜻도 좋아서.


그리고 그날이 왔다.

8주 정기검진. 미국에서는 임신을 하면 보통 8주에 첫 초음파 검진을 본다. 초음파 검진은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임신하는 동안 두세 번 정도 본다. 8주, 18-22주. 나머지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도플러 기계로 심장 소리만 확인한다고.

내가 갔던 곳은 집 근처의 프린스턴 OBGYN이었다. 이곳은 초음파사가 따로 있어서 8주 차에 갔을 때 의사도 안 보고 바로 초음파사를 만났다.

우리 둘 다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을 생각에 매우 들떠 있었고 초음파사(60대 백인 여자) 역시 활짝 웃으며 임신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초음파를 보기 시작하였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로 시작한 우리는 그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고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초음파실에서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화면 속의 아기는 예상대로라면 좀 더 발달된 모습이어야 하는데 예상과는 달리 조금 덜 발달이 되어 있었고 반짝거린다던 심장이 보이지 않았다.

초음파사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고, 자세한 것은 담당의와 얘기해야 하겠지만 자신이 보기에 아기가 7주 차에 이미 심장이 멈춘 것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초음파사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정리하더니 충분한 시간을 갖고 나와도 된다며 I'm sorry...라는 말을 남기고 어두운 초음파실에서 나갔다. 일 년도 훨씬 넘은 지금, 이 이야기를 적는데 아직도 마음이 먹먹하고 눈물이 나는 걸 보니 아직도 그때의 아픔이 다 가시지 않았나 보다.

가장 충격이었던 것은 나는 그때까지도 입덧이라든지 피곤함과 같은 임신 증상이 있었는데 아기는 일주일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죽은 아기를 뱃속에 품고 일주일 동안 지내왔다는 것.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는 것.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잔뜩 신이 나 초음파실까지 와 앉아 있었다는 것...

우리 둘은 어두운 초음파실에서 무너졌다. 어쩐지 모든 것이 너무 수월하게 흘러가더라니... 갑자기 현진건의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하.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었다. 말도 안 돼. 무척이나 기뻐하던 한국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떻게 말을 전하지...? 2주 후에 오실 시부모님... 모르셔서 다행이다.

초음파실에서 나와서 진료실에서 담당의를 기다리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함께 오열했다. 

간호사 둘이 들어오더니 한 분은 나에게 반복해서 단호하게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이게 끝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고통받지 않아도 돼."

나도 다 아는데... 이게 이성적으로 생각이 잘 안 되더라. 그렇게 쉽게 슬픔과 아픔이 털어지지가 않는다고.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던 간호사는 먼저 나갔고, 다른 간호사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도 유산해 봐서 알아. 정말 힘들지?"

그 말에 나는 펑펑 울어버렸다. 우리는 믿기 힘든 이 사실을 어떻게든 인정해야 하고 나아가야 했다. 20분 정도를 울었을까. 그동안 간호사는 우리를 계속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가 들어왔다. 5주 차에 봤던 백인 남자 의사는 소파수술을 하지 않기에 인도계 여자 의사가 들어왔다. 자신을 소개한 뒤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나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나는 일주일 동안 자연적으로 유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파수술을 하고 싶다고 말하였고 수술 날짜는 사흘 후로 예약이 되었다.(미국은 한국처럼 바로 수술해 주지 않는다) 이로 인해 아직 임신 사실을 회사에 알리지 않은 남편은 수술일 하루, 휴가를 내기 위해 상사에게 유산 사실을 알려야 했고 상사는 같이 슬퍼해주며 당연히 쉬어도 된다고 휴가를 허가해 줬다.(남편의 직업 때문에 휴가를 내려면 보통 2달 전에 신청해야 한다.)

사이토텍이라는 알약을 처방 받았다. 이 약을 받으러 또 Walgreens까지 가야 하다니. 수술 전날 밤 12시에 사이토텍을 먹고 아침에 공복으로 병원에 오면 된다고 했다. 수술 병동은 산부인과와 붙어 있는 다른 건물에 있었다. 위치를 안내받고 접수한 뒤 집에 왔다.

우리 둘은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부둥켜안은 채 펑펑 울었다. 나에게는 아직도 임신 증상이 있는데... 호르몬은 참 야속하구나.


한국 시간으로 밤 10시쯤, 엄마에게 카카오톡 영상통화를 걸었다. 엄마의 촉이란 이런 것일까? 엄마가 화장실에 계셔서 남동생이 웃는 얼굴로 "웬 일이야?"라며 받았는데 뒤로 급하게 뛰어오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에는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주말마다 전화를 드리는데 이날은 주말도 아니고, 산부인과에 다녀올 거라던 딸이 전화를 걸었으니... 엄마는 바로 물어보셨다. "왜, 무슨 일 있어?"

그 말을 들은 나는 눈물을 터트렸다. 말하지 않아도 가족들은 알 수 있었다. 엄마도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셨고 아무 생각 없이 웃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던 남동생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됐어..."

나중에 퇴근하신 아빠도 화면에 등장했는데 가족들 분위기를 보고 아빠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죄송해요. 미리 말씀을 안 드렸으면 슬퍼하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요. 엄마는 이미 외할머니며, 이모들, 직장에까지 자랑을 해 놓은 상태여서 더욱더 참담하셨을 거다. 그래도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니까 다행인 걸까. 아니야, 말하지 말걸. 다음에는 안정기가 될 때까지 말하지 말자...


수술 전까지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남편이 나보다 더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래, 이게 끝이 아니니까. 다음을 위해 먹고 힘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남편은 밥맛도 없다고 하고 한동안은 침대에 누워 지냈다. 딱 하나, 남편이 코스트코에 장을 보러 갔을 때 평소에 살이 찐다며 사는 것을 참았던 초코 쿠키 박스를 집어들었다. 단 걸 먹고 싶단다.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쿠키는 상당히 맛있었는데 유산을 위로하기 위해 먹었던 쿠키라서 그런지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코스트코에서 그 쿠키를 보면 슬픔이 밀려와 울컥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쿠키를 더 이상 사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에게는 다섯 마리의 털 달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강아지 세 마리, 고양이 두 마리. 그 녀석들 덕분에 누워서 우울하게만 지낼 수 없었다. 우리만 보고 있는, 우리가 돌봐줘야 할 아이들이니까. 그리고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의 슬픔을 위로해주기도 하였다. 정말 많은 위로가 되었다. 덕분에 금방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주 깊은 슬픔의 구렁텅이에 빠져 꽤 오랫동안 허우적대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드디어 수술일 하루 전. 자기 전 12시에 사이토텍을 먹고 누웠다. 내일이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겠지.

그리고 새벽 5시, 눈을 떴다. 배가 엄청나게 아팠다. 화장실이다. 사이토텍의 부작용(?)은 심한 설사라고 하였다. 과연... 내 인생에서 식중독에 걸렸을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심하게 설사를 했던 적이 있던가. 정말 변기에 한 시간 동안 앉아서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설사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동시에 유산도 진행되고 있었다. 끔찍했다. 꽤나 아프긴 해도 통증 때문이 아니라 기분 때문에.

한 시간 후,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판단이 되어 병원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는 도중 뭔가가 꿀럭거리며 밑으로 툭 떨어졌다. 핏덩이. 태반이었다. 의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기회가 되어 아기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면 아기를 지퍼백에 싸서 가져오면 검사를 통해 뭐 때문에 유산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영어로 검색하면 못 찾을 의학적 사진이 없다. 이런 건 무조건 영어로 검색.) 알아보고 살펴보는데 아기는 없고 태반뿐이었다. 아기는 변기를 통해 이미 사라진 후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 씁쓸했다. 누구는 묻어주기도 했다는데 난 그럴 기회도 없었으니.

생리대를 하고 병원에 갔다. 대기실에 앉아 있었는데 수술실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남편과 같이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는데 안 된단다. 내가 영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편이 해 주면 좀 더 편한데. 나한테 아직 의학적 용어들은 어렵기도 하고.

수술실로 가는 길에 간호사가 나보고 무슨 수술 때문에 왔냐고 묻는다. 이런 것도 내가 알려 줘야 하나? 차트에 안 적혀 있나?라는 생각을 하며 덤덤하게 유산해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급한 걸음으로 앞서 걷던 간호사가 갑자기 우뚝 선다. 나의 얼굴을 보고 다시 묻는다.

"왜 왔다고?"

"유산 때문에 수술해야 해서."

갑자기 간호사의 냉랭하던 표정에 온기가 생겼다.

"I'm so sorry...(정말 유감이야)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힘들지만 난 괜찮아."

갑자기 많이 친절해진 간호사가 나를 수술대로 안내하였고 이것저것 배려해 주었다.

혼자 옷을 수술복으로 다 갈아입고(뒤는 간호사가 묶어주었다), 축구 선수나 신을 것 같은 아주 긴 빨간색 일회용 양말을 신고 수술대에 누웠다. 양말을 꼭 신어야 한단다. 담요도 써야 한단다. 이 싸구려 양말과 담요도 우리가 가입한 보험에 비싼 가격으로 청구되겠지.

수술대에 누워(한국과는 참 다른 수술실 풍경에 신기해하며) 의사를 기다렸다. 곧 마취과 의사가 와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을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설명하고 서류에 서명하라고 했다. 서명하고 나니까 아까 그 간호사가 팔에 수액 주사를 놔줬다. 나는 평소에 굵은 바늘로 찌르면 혈관통이 있다고 작은 바늘로 놔 달라고 했더니 그런 통증은 처음 들어봤다며 마취과 의사의 허락 하에 좀 더 작은 바늘로 놔줬다. 산부인과 의사는 십여 분 후에 초음파사와 함께 등장하였다. 초음파사가 거대한 초음파 기계를 들고 왔다. 산부인과에서 일하는 초음파사와는 다른, 불친절한 초음파사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의사한테도 불퉁거리던 사람이었다.

초음파사가 초음파 기계로 보여주는 초음파 화면을 확인하던 의사는 약간의 피고임이 보이는데 80% 정도는 다 나온 상태라고 하였다. 나보고 수술을 진행하겠느냐는 질문에 남편과 상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금 이따 남편이 수술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상의 후 소파술을 받지 않기로 했다. 약으로 거의 다 나왔다는데 굳이...? 

의사는 쿨하게 오케이 하고 오늘은 수납 후 집에 가면 된다고 했다. 일주일 후에 피검사를 하러 오라는 말과 함께. 아까의 그 친절한 간호사는 나에게 뭐라도 마시겠냐고 물었다. 사과 주스가 있다는 말에 그걸 먹겠다고 했더니 요플레 팩 같은 사과주스를 줬다. 나오면서 남편이 농담조로 말하기를, 그 사과 주스 팩은 보험사에 적어도 10달러에 청구될 거라고. 아... 그래, 미국의 병원은 이런 식으로 적자를 메우고, 보험사들은 이런 것들 때문에 비싼 보험료를 청구하겠구나. 결국 고통을 받는 것은 착실히 보험료를 내는 환자들이겠구나. 미국의 의료 시스템 문제는 참 어디서부터 고쳐 나가야 할지 감도 안 온다.


집에 온 후 사흘 정도는 진짜 푹 쉰 것 같다. 피도 계속 나오고. 평소 생리할 때보다 많이 나왔다. 그래도 임신과 관련된 증상들은 정말 빠르게 사라졌고 일주일 후 피검사 결과 임신 호르몬 수치가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수치가 5 이하로 될 때까지 계속 일주일마다 피검사를 해야 한다고... 굳이...? 피를 뽑는 건 정말 불쾌한 일이란 말이다.

일주일 후에 오라는 걸 스케줄을 핑계로 2주일 후에 갔다. 그러고 나서도 일주일 후에 또 오란다. 하... 호르몬이 참으로 안 떨어지는구나. 결국 한 달 동안 세 번 피를 뽑고 나서야 안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물론 산부인과에 들를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우리의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은 덤이었고.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에 시부모님께서도 방문하셨고 친구들도 방문했다. 남들 앞에서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지만 아주 가끔씩 마음이 힘들어서 무너지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토닥이며 잘 버텼다. 다시 가지면 되잖아! 첫 시도에 성공하였기에 자만했던 우리였다.

유산 후 첫 생리를 했는데 예정일보다 늦게 시작했다. 늘 규칙적이었던 난데... 조금은 불안해졌다. 설마 소파술을 안 받아서 그런 건가... 다음 달 생리도 아주 살짝 늦게 시작했다. 그래도 그전 달보다는 덜 늦었다. 우리는 임신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패.

그리고 그때부터 매달 배란 테스트기를 이용하며 계속 시도했다. 실패. 또 실패. 그리고 계속되는 실패.

어느덧 임신을 시도한 지 일 년이 되어 갔다. 아... 이런 것도 초심자의 운, 뭐 그런 것인가? 어쩌면 이렇게도 임신하기가 힘들다는 말인가. 낙담했다. 한국에 계신 엄마는 왜인지 모르게 초조해하기 시작하셨다. 시험관 얘기를 꺼내신다. 이제 꼼짝없는 노산이기 때문에 더 불안해하신 듯 보였다. 근데 엄마... 미국에서 시험관이 얼마나 비싼지 알고 계시나요? 허허허.

일 년쯤 되니까 아기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털 달린 아이들과 나에게는 완벽한 내 남편과 함께라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겠다 싶더라. 억지로 시험관을 통해 갖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때의 내 마음이 그랬다. 그래서 그동안 임신이 될까 봐 포기했던 한국 여행을 계획했다. 비행기 티켓도 사고 코로나 때문에 못 갔던 한국에 가서 뭘 먹을지 여행 계획을 짜며 한껏 들떠 있었다.


그리고 한국 여행 2주 전 토요일 아침, 왜 생리가 시작되지 않을까. 설마...?

2023년 8월 12일. Clearblue사의 Early Detection Pregnancy Test를 해 봤다.

두 줄. 뭐야, 임신이 되어버렸잖아?! 포기하면 된다더니 그 말도 사실이었던 것인가!

너무 기뻐서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당장 알려야지. 그리고 이번에는 부모님께 꼭 안정기가 되면 알려 드릴 거야!라고 또다시 오만한 생각을 하였다.

잠깐, 한국 여행은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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