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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ermore Jul 19. 2021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어쩌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인데도


저는 원래 작가가 꿈이었어요.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눈썹을 치켜뜨고 놀란다. 주로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렇다. 초년생일 때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삶의 어느 페이지에서 만나든 나는 나였고, 그러니 대책 없이 낭만적이고 무엇이든 텍스트로 설명하고 싶어하는 나의 성향이 회사에서도 다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알지. 회사에서 살아가는 나는 다른 나라는 걸. 그리고 다른 나로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경계가 점점 옅어져서, 이제는 예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희미하고, 어쩌면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을 수 있다는 걸.


최근 회사에 변화가 생겼다. 이직을 하고 9개월 만이다. 보스도 바뀌고 일도 바뀌었다. 이제야 겨우 적응하고 있다고 안심할 찰나에 또 적응을 해야 하는군. 초반엔 좀 아찔했다. 새로운 보스는 젠틀하고 친절한 태도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새로 오신 분 진짜 나이스하시더라, 너무 좋겠다. 나는 끄덕끄덕 하면서도 속으로는 말꼬리를 늘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가 누구보다 엄격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높은 기대치를 적용해도 따라올 법한(본인 스스로를 포함하여), 그리고 따라와야 하는 역할의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혹독히 구는 사람일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일수록 타인에게는 유한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 그의 친절함에 속아 안일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높은 기대치를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그 탓인가, 요 몇 달간이 나에겐 매 순간 순간이 면접이고 평가로 느껴졌다. 


장표 하나, 보고 하나, 미팅 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집에 돌아오면 이상하게도 각성 상태가 되곤 했다. 하루를 꼬박 쏟은 긴장이 풀리지 않은 탓이다. 맥박은 여전히 빠르고 머리 속에선 계속 오늘 잘못한 것, 내일 다시 해야 할 것, 더 고민해야 할 것들이 아우성이었다. 그럴 땐 좀 가만히 있어 주면 좋겠는데, 마음도 한 마디를 거든다. 아무래도 나는 안 될 것 같아. 


그럴 때 군말 없이 운동복을 입고 러닝화를 신었다. 생각할 겨를 없이 밖으로 나갔다. 껌껌한 길을 걷고 뛰었다. 숨이 차오르고 더위에 얼굴이 달아오르면 그제야 머리도 마음도 조용해졌다. 몸이 내는 소리 - 발이 움직이고 숨이 쉬어지는 소리 - 만이 가득하고 이따금 떠오르는 생각들마저도 여름밤 풀벌레 소리와 후덥한 공기에 밀려나곤 했다. 그렇게 달리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원래 나인데.


태어났을 때부터 내 몸에 붙어 있던 두 다리, 쉬지 않고 혈액을 뿜는 심장, 내가 쉬는 대로 가빠지는 숨. 어쩌면 그냥 이게 나인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걷는 걸음이 다 나인데. 하루 종일 타인의 평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내가 얼마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내가 생각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고 심지어 열심히까지 하는 사람이라고, 온몸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시간들이 그제야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게 원래 나고,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땀을 흘려서가 아니라 머리를 비워서 상쾌한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처음에는 고통스럽던 달리기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집에서 드러누워 있다가도 문득 나가서 달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땡볕에 나가서 쓰러지고 싶지 않으면 자제하자는 생각을 할 만큼. 체력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건지, 회사에서도 곤두선 신경 때문에 삶을 갉아먹히는 일은 없어졌다. 시도때도 없이 치밀던 짜증도 아주 조금씩 줄어가고 있다. (아마도)


며칠 전 맥주 한 잔 하자는 보스의 이야기에 야근을 급히 마무리하고 치킨집에 갔다. 차가운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니 살 것 같았다. 더 잘해야죠, 조금 풀어진 와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상대가 말했다. 너는 역량이 있는 사람이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하면 될 것 같다. 그 말로 나의 면접도 끝이 났다. 적어도 나는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가끔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과해서 조급해지기도 한다는 걸 그가 알았다면 됐다 싶었다. 그게 내가 얻고자 했던 최소한의 인정이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허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맥주잔을 비우고 말했다. 


저는 원래 작가가 꿈이었어요.


나를 파악할 시간을 충분히 주고, 바르게 평가받기 위해 미친듯이 애쓴 후에야. 

어쩌면 처음으로 내가 스스로 건넨 자기소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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