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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ermore Jul 25. 2021

우리는 다시 이렇게

여름 친구 이야기

7월 25일 아침은 20년지기 친구와 함께 눈을 떴다. 전날 저녁에 동네에 놀러와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청국장을 먹었다. 내가 그 친구와 살았던 동네는 이 곳에서 2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여섯 시에 퇴근하는 나를 위해 친구는 기꺼이 세 시에 조퇴를 했다. 출근하는 시간과 퇴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며 심지어는 영광스런 일인지. 제대로 그 마음을 이야기한 것 같지가 않아서 미안했다.


아침잠이 적은 내가 먼저 눈을 떴고 (아침잠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8시에 일어나는 걸 아침잠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느긋한 친구는 9시 반이 되어 눈을 떴다. 친구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게 좋았다. 우리 집에서 누구보다 편하게 잠든 것 같아서. 우리는 서로의 공간에서 여러 번 잠을 잤지만 그래도 타인인 건지. 가끔은, 내가 정말 편할까? 편하다고 얘기는 하는데 정말 그럴까? 그런 게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는 열 두 살에 처음 만났다. 나는 학창시절을 보낸 곳에서 지금 두 시간은 먼 곳에 살지만, 열 한 살 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딱 정반대 방향으로 두 시간 먼 곳에 살았다. 우스운 셈이다. 동쪽으로 먼 곳에 살았던 사람이 서쪽으로 먼 곳에 살기도 한다. 그 지역이 나에겐 당연한 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 뿐이다. 처음 전학을 간 날 그 친구를 만났다. 눈이 동그랗고 예쁘장해서 새침떼기 같이 보였다. 나는 빼죽한 단발머리에 뾰족한 마음을 갖고 있었음에도 나를 좋아해 줬다. 터울이 큰 내 동생은 내가 열 한 살에 태어났지만, 그 친구의 동생은 우리가 처음 만난 열 두 살의 어느 날에 태어났다. 그 애는 개학식 첫날 연락을 받고 교실을 먼저 나섰었다. 나는 고작 일 년 정도 그걸 먼저 겪어 봤다고, 우쭐대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서둘러 병원에 가도 바로 볼 수 없는데. 한참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린 어쨌든 그 때부터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줄곧 함께 지냈다. 어떤 해에는 멀고 어떤 해에는 가깝게. 가까울 때는 행복하기도 하고 멀어졌을 때는 슬프기도 하면서. 나는 빼죽한 단발머리에서 멋을 부린 중단발이 되었다가 다시 짧은 머리가 되었다. 친구는 새카맣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길렀다 묶었다 때로는 잘랐다가 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나는 학창시절 친구랄 게 없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고통스러운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만나지 않게 되었고 중학교 친구들에겐 어쩌다 불편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과연 날 궁금해할까? 날 필요로 할까? 내가 연락하면 반가워할까? 아닐 것 같으면 연락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동그란 내 친구는 항상 나를 신경써 줬다. 뭐 해? 어떻게 지내? 왜 연락이 없어? 나는 그녀의 친절함과 다정함, 그리고 때로는 지나칠 정도의 솔직함에 매료되었었다. 정말 이십 년 동안 그랬다.


우리는 똑같이 7월에 태어났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고 모든 초록과 모든 파랑이 반짝거리는 시기에. 다시 말하면 여름방학 즈음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방학 즈음이 되면 친구들에게서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고작 일주일 간의 텀을 둔 서로의 생일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 태어난 사람들은 다정하고 활기차다는 이상한 선입견을 안은 채. 그렇게 이십 년을 서로의 생일 사이에 섰다. 서로가 회사를 다니게 되고 지역이 달라지면서는 일 년에 한 두 번, 그것도 꼭 여름에 생일 축하를 명목으로 마주앉았다. 


근사한 곳에 가자는 이야기들을 잔뜩 해 놓고도 결국 우리 집 식탁 앞이었다. 촛불도 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이미 다 해 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메론을 잘라 먹고 체리를 씻었다. 달달한 맛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티브이를 보며 다른 친구 누구와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했다. 나 저런 거 보면 그 때가 생각나. 백 번은 한 것 같은 옛날 이야기와, 지나간 사람들과, 오지 않은 미래의 두려움을. 과일 맛도 나고 맥주 맛도 감도는 입맛을 다시면서. 


헤어지기 전, 친구가 생일축하 카드를 써 달라고 졸랐다. 어린 날부터 내 글을 이상하리만치 좋아하던 친구였다. 글에는 취미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내 글만. 나는 우쭐했었고 지금은 머쓱하지만, 그래도 성화에 못 이겨 펜과 종이를 들었다. 책상에 억지로 앉아 아무 말이나 끄적이면서, 좋은 말이 없을까 내내 골랐지만 역시 급히 쓰는 글에는 영 깊이가 없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는 평생 그렇게 서로의 여름을 축복할 운명이라고.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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