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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롱 Mar 23. 2021

우리 고객 중에 진상이 어디 있어?

여기 있다, 이 자식아.



사무실 직원들은 가끔 빡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예를 들면 느긋하게 점심시간 바로 직전에 출근한 대표가,



"고롱씨, 우리 고객들 정도면 천사야. 천사. 진상이 어디 있어?"



라는 되지도 않는 말을 씨부릴 때가 대표적이다.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나도 사장처럼 중년 남성의 목소리로 어떤 문제든지 본인이 바로 수습 가능한 자리에 앉아 있다면 진상이 어딨냐고 하하호호 커피를 들이켤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내가 사장이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아무런 일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말단 사원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 문제는 또 나다. 내가 문제다.






남자 말고, 여자 바꿔! 






상담 업무를 하다 보면, 내 콜이 아닌데도 내 자리로 콜이 유입되는 경우가 있다. 나 외에 전화를 함께 받아주는 직원은 남자분인데, 넘기면서 한다는 말이 이런 거다.



"남자 목소리는 무섭다고 여자 직원을 연결해 달라네요."



그렇게 연결된 고객은 어떤가.

받자마자 반말에 왜 무섭게 남자가 전화를 받게 하냐고 나에게 소리소리를 질러댔다. 분명 남자 직원이 전화를 받았을 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너무 불편하고 무서워서 그런데 여자 직원으로 바꿔주실 수 있나요?" 존칭까지 꼬박꼬박 썼다던데.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목소리 탓인가 싶어 팔자에도 없는 저음 연습까지 해봤다. 결과는 똑같았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 목소리가 아니라 내 성별에 있었던 거다. 


가끔 내가 바쁘거나, 자리를 비웠을 때에는 타 부서 직원들이 전화를 대신 받아 줄 때가 있는데 그분들에게 물어보면 그 어떤 고객도 화난 목소리로 유입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냥 뭐가 잘 안 돼서 확인하려고 전화했대요. 화난 목소리는 아니던데요?"



그러나 내가 여보세요 한 마디만 내뱉어도, 고객은 강성 항의를 시작한다. 뭐가 안된다는 문의는 일단 짜증이 났다는 건데, 남자 직원이 받으면 화 한 번 안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전 일이었다. 


타 부서 여직원이 울상으로 "고롱씨는 하루 종일 이런 전화 어떻게 받아요?" 말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은 거다. 






사장님, 나빠요.






그러던 차에 연봉협상 시기가 다가왔고, 대표는 나를 불러 진지한 얼굴로 이런 말을 했다.



"고롱씨. 사실 고롱씨 업무가 그렇게 빡센 업무는 아니잖아. 좀 더 공부하고, 좀 더 노력해야지. 회사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가면 아깝지 않아?"



그리고 그 쯤부터 나는 이 빌어먹을 회사를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표님. 대표님이 저예요? 제가 되어 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진상이 없고, 제 업무가 쉽다고 단언하세요? 제가 하루 종일 받는 무시와 조롱을 어떻게 안다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시냐고요. 저세요? 대표님 저냐고요. 


말은 못 해도 씨근덕거리는 내 표정을 보고 대표실엔 잠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역지사지란 말도 모르는 건가. 내 목소리로, 내 성별로, 내 자리에서 전화를 받아본 적도 없으면서. 진짜 당신이 뭘 알지? 실무에서 내가 구르는 건 생각도 못하고 그저 전화 몇 통 받고 집에 가는 건 줄 알다니.


나는 잔뜩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시국이라 어렵지만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연봉은 올려주겠다고 했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하루하루 우울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버티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내가 우스워 보였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란 고통은 다 받으면서, 남들이 보기엔 할 짓 없이 시간이나 때우는 놈으로 보인다니. 더 이상 이 회사에서 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지식인 같은 게시판에 이직 고민을 올린 적이 있다. 현재하고 있는 업무는 이렇고 저렇고 가장 스트레스인 전화 업무가 싫어 이직을 하려고 합니다. 다만, 이렇다 할 뚜렷한 스펙도, 능력도 없어요. 제가 이직이 가능할까요?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댓글 하나가 달렸다.


이직은 가능하겠죠. 그런데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님은 또다시 전화 업무를 하는 곳으로 밖에 이직할 수 없을 걸요? 다른 직무로 가고 싶다면 스펙을 쌓고, 능력을 만드세요. 난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 불쌍하게 말해도 현실에선 아무도 님을 채용해 가지 않아요. 이력서에 적힌 고객센터 글자만 보고 또 똑같은 회사로 뱅뱅 돌기만 하겠죠. 

그래도 힘내세요.


순식간에 쇠망치 하나가 머리통을 휘갈긴 느낌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익명의 힘을 빌어 추상적인 위로라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넌 할 수 있어, 같은 뜬구름 잡는 말들.


그러나 돌아온 건 제법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때서야 객관적인 눈으로 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망했지. 






그래도 저, 퇴사할 겁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그래도 2021년의 상반기라는 거다. 아직 올해엔 남은 계절이 있고, 나는 그 계절 동안 탈피할 마음이 있고, 나의 고통과 힘듦을 알아주지 않는 이 회사를 박차고 나가기엔 시간이 충분하다는 사실이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사실 무섭긴 하다. 이 시국에 나가서 뭘 해 먹고살겠다는 건가. 그렇지만 출근하면 줄줄 눈물부터 나는데 별 다른 방도가 없지 않을까요. 흑흑)


대표는 오늘도 우리 고객들은 참 수준이 높다며 말을 건넸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한 번도 나로 살아보지 못했으면서 그 딴 말을 하냐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앓느니 죽고 만다고, 내가 나가는 게 빠르겠지. 암요, 암요.




큼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제가 일한 만큼 격려해 주고, 고객을 생각하는 만큼 직원의 마음 또 한 헤아려 줄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납니다. (회사) 여러분들은 평생 본인의 눈높이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며 사세요~ 


행복하세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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