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글이 아닙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는 시인이 있다. 10년 전 나는 그에게 잡지에 실을 산문 연재를 부탁했다. 시인은 눌변으로 수락하며 물었다. 산속에서 혼자 사는 나무꾼일 뿐인데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요? 거기, 숲속 이야기를 써주세요. 연재 몇 번에 시인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염소를 키우는 노부부라는 것, 먹으려는 게 아니라 파란 배춧잎이 보기 좋아서 한두 고랑 재배한다는 것, 벌통 몇 개 놓고 벌들의 삶을 지켜본다는 것, 심심하면 밥상에 국어사전을 펼쳐 놓고 읽는다는 것을 알았다.
원고를 청탁하면서 원고료가 작아 미안하다고 하자 시인은 그 돈이면 전기요금도 내고 몇 가지 양식도 산다고 했다. 6개월 쓰기로 한 것이 1년이 넘어가자 잡지가 없어질 때까지 쓰면 좋겠다며 웃었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되었다. 운영이 어려워져 잡지를 폐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시인에게 그 소식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차일피일 미루다 짧은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열어 보니 시인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달빛과 함께 전기요금을 나누어 내라며 보내주셨던 원고료는 저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무엇을 타인에게 줄 때 얼마나 겸손과 예의가 필요한 것인가를 글을 연재하면서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 전기요금은 달님에게 다 내라고 하면 되니까요.'
그러고는 곧 실직자가 될 나를 걱정해 주었다.
'장마에는 벌들도 꿀을 축낸답니다. 장마 걷히고 여름 가을 지나서 벌통을 열어 봐야 꿀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안답니다.'
부지런한 꿀벌도 제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을 만나면 날개를 접고 집 안에 있는다고, 그러니 지금 수확이 없다고 스스로를 나무라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시인이 가꾸는 언어의 숲에서 고른 말들은 얼마나 따뜻한가. 그동안의 마음 고생을 알아주는 시인 덕분에 나는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산속 외딴집에 전기가 끊어져도 달빛이 있으니까 진짜 안심이 되는 그런 기분이랄까. 돌이켜 보면 참 외롭고 쓸쓸했던 그날, 나는 그렇게 위로를 받았더랬다.
그리고 물건이건 말이건 마음이건, 타인에게 무언가를 줄 때 진심으로 그것이 그 사람을 위한 것일지라도 겸손과 예의가 필요하다는 말이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때로는 선의에 의한 상처가 더 아픈 법이니까.
생각해 보면 시인은 원고 끝에 늘 몇 마디 덧붙여 보냈다. '눈이 내린 아침은 제가 다니는 모든 길이 첫 발자국입니다. 가끔은 저보다 먼저 일어난 작은 짐승들의 발자국을 봅니다', '군불에 묻어 둔 고구마를 잊고 잠들었는데 고맙게도 강아지가 재를 파헤치고 꺼내 먹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개밥 그릇에 살얼음이 끼었습니다. 긴 침묵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벌들이 분봉을 시작했습니다. 수만 수천의 벌들이 웅웅거리며 날갯짓 소리를 내면서 작은 구멍으로 분주히 드나드는 것을 무심히 바라봅니다'라는 이야기 들. 눈앞에 그려질 듯한 시인의 숲속 일상은 나에게 어떤 안부를 묻는 것만 같았다. 숲에 깃든 평온함이 마음에 따뜻하게 번졌다.
시인은 마흔 즈음 홀로 산으로 들어갔다.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스스로 내 영혼을 위로하고, 내 삶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 숲으로 들어왔습니다'라고 했다. 시인의 산행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기울어진 마음을 돌보겠다는 선택이었다. 그가 나에게 보내온 어느 달의 안부이다.
'지붕에 떨어지는 알밤 소리에 새벽잠을 깨면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서늘합니다. 계절은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저에게 좀 더 나아질 기회를 주고 있지만 왜 이리 어리석은지 저는 늘 자신을 괴롭힙니다. 오늘은 정신을 추스르고 고추 모종 20개, 마디호박 6포기, 방울토마토 5포기를 심었습니다.'
고요한 숲속에서도 시인은 이따금 시끄러운 마음과 마주하고 있었다. 어디에 있건 삶은 끝없이 묻고 우리는 답한다. 시인의 숲과 나의 도시는 다르지 않다. 인간의 약한 마음에 대한 연민, 그래서 시인과 나는 서로에게 미안하고 고마워했던 것 같다.
지금 내 마음 어딘가가 불편하고 아프다는 건 삶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음이다. 무언가 어긋나 있다는 뜻이다. 마음은 아픈 곳에 먼저 가 닿는다. 지금 내 마음 아프다면, 아픈 그곳에 가만 귀 기울여 볼 일이다. 나의 슬픔의 의미를 묻는 것은 내 삶과 타인에 대한 예의이다. 방치된 슬픔은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므로. 삶은 원래 슬프고 아픈 게 아니라 나 자신 때문에 아픈 것, 참 소중한 깨달음이다.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김선경, 메이븐, 2019.
*저자의 허락을 받아 책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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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한 번씩 이 작가분을 만난다. 2019년 여름에 만났을 때, 작가는 내가 책 나온 걸 알고 연락한 줄 알았단다. 사실 책 낸 줄 모르고 있었다. 그냥 왠지 생각이 났던 것. 사정도 모르고 있었던 게 송구했지만, 이렇게 시기가 딱 맞는 것도 인연인가 싶어서 서로 웃었다. 가끔 이 책을 펼쳐 본다. 집에 있는 어떤 시집보다도 이 책에 실린 시와 산문이 나의 많은 질문에 답해 주기 때문이다.
필사를 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글을 쓸 때 생각의 흐름을 어떻게 끌고 갈지 모르겠다면 시 읽기를 권한다.
야초툰님을 인터뷰한 날 오랜만에 이 작가분을 만났다. 역시나 아주 가끔 만나지만 최근에는 더 자주 연락한다.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갈수록 책 팔기가 어렵고 판매량을 예상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 이분도 출판 일을 하시니까. 그 얘기를 하다가 위의 글 내용이 생각났다. 글 쓰는 작가나 책을 펴내는 사람들 마음은 대체로 소박하다. 글 써서 번 돈으로 다음 책을 쓰면서 생활하고 싶어 한다. 책으로 큰돈을 벌고 싶다거나 인기와 명예를 바라는 사람은 사실 작가들 중의 소수이다. 설사 애를 쓴다 해도 그것만큼 얻기 어려운 것도 없다. 하지만 작가가 아무리 소박한 마음을 품어도 그조차 수없이 좌초되고 있다. 이제 책은 판매량으로만 제 이름을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이 글이 생각난다며 내 마음을 전했더니 이분은 또 나를 짠하게 보신다.